원칙
구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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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9 20:08
二 원칙(圓測)의 유식철학(唯識哲學)
<열암(列岩)의 정평(正評)
중국의 불교계를 빛낸
한국 사람의 철학적 두뇌
1. 원칙(圓測)의 학적(學的) 위치(位置)
불교(佛敎)의 대승철학(大乘哲學)은 중관(中觀) 철학(哲學)과 유식(唯識) 철학(哲學)의 둘이라고 할 수 있다. 중관철학(中觀哲學)은 심오(深奧)한 체계적 전개로써 중국의 삼론종(三論宗)의 선구자가 된 승랑(僧朗)에 관하여서는 위에서 이미 다루었으나. 그에 비하여 여기서 알아 보려는 원칙(圓測)은 바로 정치(精緻)한 의식분석 으로써 중국의 유식철학(唯識哲學)에 있어서 대표적인 사상가(思想家)들과 어깨를 겨루어 오히려 탁월한 우위(優位)를 점하였던 것이다. 한국의 불교(佛敎) 철학(哲學) 전개의 초기에 있어서의 중관철학(中觀哲學)의 승랑(僧朗)과 유식철학(唯識哲學)의 원칙(圓測)은 우렁차게 솟아오른 두 봉우리가 아닐 수 없다. 원칙(圓測)은 신라(新羅)의 왕손(王孫)이다. 본명은 문아(文雅)요 원칙(圓測)은 그의 자(字)이다. 후에 당경(唐京) 서명사(西明寺)에 머물러 있었다고 하여 서명(西明)이라고도 한다. 진평왕(眞平王)35년(서기 613)에 원효(元曉)보다 4년 먼저 탄생하였다. 삼세(三歲) 강보(繦褓)의 몸으로써 출가(出家)하여 15세 때에는 벌써 중국으로 건너가 수업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법상(法常)과 승변(僧辨)의 강론(講論)을 들었다. 어려서부터 명민(明敏)한 자질에 천총(天聰)이 오월(謷越)하여 비록 수천만언(數千萬言)이라도 한번 들으면 잊어버림이 없었고 혜해(慧解)가 종횡(縱橫)하여 비만(毘曇). 성실(成實). 구사(俱舍). 파사(婆娑)등 론(論)과 고금(古今)의 장소(章疏)를 읽되 통효(通曉)하지 못함이 없었던 만큼 명성이 높았었다. 더우기 어학을 잘하여 중국어(中國語)는 물론이어니와 범어(梵語). 서장어(西藏語) 등 6국어(六國語)에 능통하였다. 중국의 유식철학(唯識哲學)은 주로 법상종(法相宗), 즉 자은종(慈恩宗)에 의하여 연구 전개되었고, 그것의 창시자인 현장(玄奬)은 일찍이 인도(印度)로 가서 야난타사(邪爛陀寺)에 머무르고 유식(唯識)의 십대론사중(十大論師中)의 한 사람인 호법(護法)의 학통(學統)을 계승한 계현(戒賢)에게 배웠다. 여러 경론(經論) 등에 관하여 지도를 받은 중에서도 유식철학(唯識哲學)과 가장 관계가 깊은 유가론(瑜伽論)은 전후 3회나 수강(受講)하였다. 그리고 중국으로 돌아온 것이 바로 정관(貞觀) 19년(서기 645)이요 우리 원칙(圓測)과 현장(玄奘)이 처음으로 상면(相.面)한 것도 이때이다. 그때에 원칙(圓測)은 33세이었다. 한 번 만나자 의기(意氣)가 계합(契合)하여 지금까지 염마해온 자기의 능력과 지식(知識)을 발휘하게 되니 증의(證義)에 밝음이 생이지지(生而知之)함 같았다. 태종(太宗)의 소명(召命)으로 서명사(西名寺)의 대덕(大德)이 되었다. (계속)
<열암(列岩)의 정평(正評)
중국의 불교계를 빛낸
한국 사람의 철학적 두뇌
1. 원칙(圓測)의 학적(學的) 위치(位置)
불교(佛敎)의 대승철학(大乘哲學)은 중관(中觀) 철학(哲學)과 유식(唯識) 철학(哲學)의 둘이라고 할 수 있다. 중관철학(中觀哲學)은 심오(深奧)한 체계적 전개로써 중국의 삼론종(三論宗)의 선구자가 된 승랑(僧朗)에 관하여서는 위에서 이미 다루었으나. 그에 비하여 여기서 알아 보려는 원칙(圓測)은 바로 정치(精緻)한 의식분석 으로써 중국의 유식철학(唯識哲學)에 있어서 대표적인 사상가(思想家)들과 어깨를 겨루어 오히려 탁월한 우위(優位)를 점하였던 것이다. 한국의 불교(佛敎) 철학(哲學) 전개의 초기에 있어서의 중관철학(中觀哲學)의 승랑(僧朗)과 유식철학(唯識哲學)의 원칙(圓測)은 우렁차게 솟아오른 두 봉우리가 아닐 수 없다. 원칙(圓測)은 신라(新羅)의 왕손(王孫)이다. 본명은 문아(文雅)요 원칙(圓測)은 그의 자(字)이다. 후에 당경(唐京) 서명사(西明寺)에 머물러 있었다고 하여 서명(西明)이라고도 한다. 진평왕(眞平王)35년(서기 613)에 원효(元曉)보다 4년 먼저 탄생하였다. 삼세(三歲) 강보(繦褓)의 몸으로써 출가(出家)하여 15세 때에는 벌써 중국으로 건너가 수업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법상(法常)과 승변(僧辨)의 강론(講論)을 들었다. 어려서부터 명민(明敏)한 자질에 천총(天聰)이 오월(謷越)하여 비록 수천만언(數千萬言)이라도 한번 들으면 잊어버림이 없었고 혜해(慧解)가 종횡(縱橫)하여 비만(毘曇). 성실(成實). 구사(俱舍). 파사(婆娑)등 론(論)과 고금(古今)의 장소(章疏)를 읽되 통효(通曉)하지 못함이 없었던 만큼 명성이 높았었다. 더우기 어학을 잘하여 중국어(中國語)는 물론이어니와 범어(梵語). 서장어(西藏語) 등 6국어(六國語)에 능통하였다. 중국의 유식철학(唯識哲學)은 주로 법상종(法相宗), 즉 자은종(慈恩宗)에 의하여 연구 전개되었고, 그것의 창시자인 현장(玄奬)은 일찍이 인도(印度)로 가서 야난타사(邪爛陀寺)에 머무르고 유식(唯識)의 십대론사중(十大論師中)의 한 사람인 호법(護法)의 학통(學統)을 계승한 계현(戒賢)에게 배웠다. 여러 경론(經論) 등에 관하여 지도를 받은 중에서도 유식철학(唯識哲學)과 가장 관계가 깊은 유가론(瑜伽論)은 전후 3회나 수강(受講)하였다. 그리고 중국으로 돌아온 것이 바로 정관(貞觀) 19년(서기 645)이요 우리 원칙(圓測)과 현장(玄奘)이 처음으로 상면(相.面)한 것도 이때이다. 그때에 원칙(圓測)은 33세이었다. 한 번 만나자 의기(意氣)가 계합(契合)하여 지금까지 염마해온 자기의 능력과 지식(知識)을 발휘하게 되니 증의(證義)에 밝음이 생이지지(生而知之)함 같았다. 태종(太宗)의 소명(召命)으로 서명사(西名寺)의 대덕(大德)이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