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行爲)의 중요점
구경사
0
41
12.15 19:10
ㅁ. 행위(行爲)의 중요점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바에 의하면 우리들이 현재 받고 있는 환경과 모든 사연은 전생(前生)에 자기(自己)가 지은 업(業)의 결과로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고 자기가 책임지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그 환경과 인연(因緣)이 어떤 것이든지 이미 주어진 업보(業報)이므로 어떻게할 수가 없는 객관적이고 실제적인 것이다. 빈곤(貧困)한 가정(家庭)에 태어난 것도 이제 다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총명하지 못한 것도 이제 다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천재 지변을 만나서 가족을 잃고 재산을 잃게된 것을 아무리 원망하여 본들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 환경과 사연을 어떻게 받으며 어떻게 대처하여 갈것인가 이에 이르러서는 그것은 우리들의 정신과 힘의 가능한 범이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전환할 수 있는 것이다.언제까지나 비관만 하고 남의 협조만 바라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슬픈 모습의 그림을 그릴 것인가? 즐거운 모습을 그릴 것인가? 어두운 색채로 그릴것인가? 밝은 색채로 그릴 것인가? 불만족의 음영을 던질 것인가? 만족의 광채를 치랄것인가? 하는 것은 모두 화가의 의사에 있는 것이다. 성격이 음험(陰險)하면 결과와 환경도 악화 되는 것이요, 성격이 선량하면 결과와 환경이 밝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정신력이 무엇보다도 우리에겐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불교(佛敎)의 업론 정신(業論精神)은 선보(善報)나 악보(惡報)을 받을지라도 그에 끄달리지 말고 전환하려는 생각을 하는데 있는 것이니 화가가 어떤 그림을 그릴까?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생명(生命)은 끊임없이 신장(伸長)하여 가고 있다. 초목(草木)은 우마(牛馬)나 사람에게 밟혀 꺽어지더라도 생명의 새움이 돋아나고 있다. 이와 같이 업보(業報)에 짓밞혀 눌려 있더라도 우리의 생명은 끊임 없이 치솟으려는 힘이 용솟음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생명은 그렇게 쉽게 뻗어갈 수가 없기도 하다. 구원(久遠)의 업습(業習)에 눌려서 뻗어갈 생명의 줄기는 곧게 솟아오르지 못하고 비틀려서 뻗어나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 부처님께서는 이 생명의 비의(祕義)에 입각(立脚)하여 업(業)에 눌려 있는 가운데로부터 곧게 생명이 솟구쳐 나올 수 있음을 가르치셨다. 그것은 생명은 인인 각자(人人各自)의 창작(創作)인 까닭이다. 주어진 환경과 업의 바탕위에 인생의 그림을 그리는 것 같은 것이다. 대개는 비관의 그림과 참담한 그림과 같은 미(迷)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은 자와 믿음의 뿌리가 있는 자는 밝은 그림을 그리려고 애쓸것이다. 이것이 우리 인간들의 정신적 자유력(自由力)인 것이다. 우리는 이 자유의 의지(意志)에 의하여 전개된 경과를 좋은 색채로 물들여서 인생을 개조(改造)하고 항상 발전시켜가는 인생을 살자. 이것이 우리의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기신론(起信論)에서는 뼏쳐 올라가려는 생명력을 내훈(內熏)이라 하고 밖으로 물이 들오서 병든 싹을 외훈(外熏)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빈궁하였기 때문에 분발하고 노력하여 큰 부자가 되고 몸이 허약하였기 때문에 위생에 주의하고 건강을 회복하여 위대한 체력의 소유자가 되고 또한 장수를 하는 이가 있다. 가정 불화로부터 구도(求道)의 길을 밟는 이가 있고, 가난하여 자기의 열등 의식을 고쳐서 수승한 생각을 갖게 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주어진 환경의 바탕에서 훌륭한 인생의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시 경전(原始經典)인 "아함경(阿含經),,을 보면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비구(比丘)들이여, 외도(外道)가 달려와서 무고히 너희들을 치고 때리고, 몽둥이와 칼로서 치는 자가 있다면 어떻게 생각 하겠느냐? 이때를 당하여 비구는 보복할 마음을 가져서는 아니 된다. 이것이 다 나의 전생에서 지은 업보(業報)이니 달게받으리라 생각하고 거슬리지 말라. 설사 도둑이 와서 톱을 가지고 너의 몸을 켜드라도 싫어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싫어하는 마음을 갖는 자는 나의 가르침을 지키는 자가 아니다. 그럴수록 정진(精進)하고 정념(正念)을 파하지 말며 마음을 한곳에 집중 하고 있어라. 그리해서 나의 육체상(肉體上)에는 주먹 세레가 오고, 장검(杖劍) 빗발이 쏟아지더라도 이것은 다 나의 전생(前生)의 업보(業報)라 생각하고 앙갚음할 생각을 갖지 말 것이며 상대자를 불상이 생각하여 보복도 하지말라. (계속)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바에 의하면 우리들이 현재 받고 있는 환경과 모든 사연은 전생(前生)에 자기(自己)가 지은 업(業)의 결과로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고 자기가 책임지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그 환경과 인연(因緣)이 어떤 것이든지 이미 주어진 업보(業報)이므로 어떻게할 수가 없는 객관적이고 실제적인 것이다. 빈곤(貧困)한 가정(家庭)에 태어난 것도 이제 다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총명하지 못한 것도 이제 다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천재 지변을 만나서 가족을 잃고 재산을 잃게된 것을 아무리 원망하여 본들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 환경과 사연을 어떻게 받으며 어떻게 대처하여 갈것인가 이에 이르러서는 그것은 우리들의 정신과 힘의 가능한 범이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전환할 수 있는 것이다.언제까지나 비관만 하고 남의 협조만 바라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슬픈 모습의 그림을 그릴 것인가? 즐거운 모습을 그릴 것인가? 어두운 색채로 그릴것인가? 밝은 색채로 그릴 것인가? 불만족의 음영을 던질 것인가? 만족의 광채를 치랄것인가? 하는 것은 모두 화가의 의사에 있는 것이다. 성격이 음험(陰險)하면 결과와 환경도 악화 되는 것이요, 성격이 선량하면 결과와 환경이 밝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정신력이 무엇보다도 우리에겐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불교(佛敎)의 업론 정신(業論精神)은 선보(善報)나 악보(惡報)을 받을지라도 그에 끄달리지 말고 전환하려는 생각을 하는데 있는 것이니 화가가 어떤 그림을 그릴까?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생명(生命)은 끊임없이 신장(伸長)하여 가고 있다. 초목(草木)은 우마(牛馬)나 사람에게 밟혀 꺽어지더라도 생명의 새움이 돋아나고 있다. 이와 같이 업보(業報)에 짓밞혀 눌려 있더라도 우리의 생명은 끊임 없이 치솟으려는 힘이 용솟음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생명은 그렇게 쉽게 뻗어갈 수가 없기도 하다. 구원(久遠)의 업습(業習)에 눌려서 뻗어갈 생명의 줄기는 곧게 솟아오르지 못하고 비틀려서 뻗어나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 부처님께서는 이 생명의 비의(祕義)에 입각(立脚)하여 업(業)에 눌려 있는 가운데로부터 곧게 생명이 솟구쳐 나올 수 있음을 가르치셨다. 그것은 생명은 인인 각자(人人各自)의 창작(創作)인 까닭이다. 주어진 환경과 업의 바탕위에 인생의 그림을 그리는 것 같은 것이다. 대개는 비관의 그림과 참담한 그림과 같은 미(迷)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은 자와 믿음의 뿌리가 있는 자는 밝은 그림을 그리려고 애쓸것이다. 이것이 우리 인간들의 정신적 자유력(自由力)인 것이다. 우리는 이 자유의 의지(意志)에 의하여 전개된 경과를 좋은 색채로 물들여서 인생을 개조(改造)하고 항상 발전시켜가는 인생을 살자. 이것이 우리의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기신론(起信論)에서는 뼏쳐 올라가려는 생명력을 내훈(內熏)이라 하고 밖으로 물이 들오서 병든 싹을 외훈(外熏)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빈궁하였기 때문에 분발하고 노력하여 큰 부자가 되고 몸이 허약하였기 때문에 위생에 주의하고 건강을 회복하여 위대한 체력의 소유자가 되고 또한 장수를 하는 이가 있다. 가정 불화로부터 구도(求道)의 길을 밟는 이가 있고, 가난하여 자기의 열등 의식을 고쳐서 수승한 생각을 갖게 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주어진 환경의 바탕에서 훌륭한 인생의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시 경전(原始經典)인 "아함경(阿含經),,을 보면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비구(比丘)들이여, 외도(外道)가 달려와서 무고히 너희들을 치고 때리고, 몽둥이와 칼로서 치는 자가 있다면 어떻게 생각 하겠느냐? 이때를 당하여 비구는 보복할 마음을 가져서는 아니 된다. 이것이 다 나의 전생에서 지은 업보(業報)이니 달게받으리라 생각하고 거슬리지 말라. 설사 도둑이 와서 톱을 가지고 너의 몸을 켜드라도 싫어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싫어하는 마음을 갖는 자는 나의 가르침을 지키는 자가 아니다. 그럴수록 정진(精進)하고 정념(正念)을 파하지 말며 마음을 한곳에 집중 하고 있어라. 그리해서 나의 육체상(肉體上)에는 주먹 세레가 오고, 장검(杖劍) 빗발이 쏟아지더라도 이것은 다 나의 전생(前生)의 업보(業報)라 생각하고 앙갚음할 생각을 갖지 말 것이며 상대자를 불상이 생각하여 보복도 하지말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