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계
구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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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9 15:04
제5항(第五項) 오계(悟界)로의 과정(過程)
우리 중생(衆生)은 어쨌거나 미계(迷界)에 떨어져 있다. (하향유전 = 下向流轉), 그리고 우리는 또한 한시라도 빨리 오계(悟界)로 되돌아가야 한다. (상향환멸 = 上向還滅), 만일 우리가 오계(悟界)로 되돌아갈 수 없다면, 즉 고해(苦海)의 중생(衆生)을 면할수 없다면 그 어느 가르침도 우리에겐 하등의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무명(無明)이 진여(眞如)를 가려 유전(流轉) 하였다면 무명(無明)을 없애면 진여(眞如)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해(일 =日)가 구름에 가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 성현(聖賢)은 무명(無明)으로 인한 번뇌(煩惱)의 구름이 아주 얇거나 없는 것이요 중생(衆生)은 그 구름이 두꺼울 뿐이다. 따라서 문제는 진여(眞如) 그 자체가 아니라 본래의 그 자리로 어떻게 되돌아 가느냐 하는 것이다. 환멸(還滅)이란 미계(迷界)에서 차츰 오계(悟界)로 깨달아가는 것이니 이것을 시각(始覺)이라 하는것 이것에는 다음과 같은 네가지가 있어 이것을 시각사위(始覺四位)라고 한다.
(1). 범부각(凡夫覺) : 중생(衆生)들이 깨달아 들어가는 첫 과정(過程)으로 성현(聖賢)들의 가르침에 의하여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의 인과도리(因果道理)를 자각하고 고통이 두려워 악업(惡業)을 짓지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 상태에선 인과(因果)의 도리(道理)를 자각하고 고통이 두려워 악(惡)을 짓지 않을 뿐 번뇌(煩惱)를 끊을만한 지혜(智慧)가 일어난 것이 않이기에 번뇌(煩惱)를 끊는 적극성이란 아직 없고 엄격한 의미에선 <깨달음>이라 할 수 없어 이것을 또한 불각(不覺)이라고 한다.
(2). 상사각(相似覺) : 성문(聲聞) 연각(緣覺)의 이승(二乘)과 대승(大乘)의 삼현(三賢 =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양(十廻向)의 보살(菩薩)들이 아공(我空)의 이치를 깨달아 아집(我執)을 떠난 것을 말한다. 그러나 바로 이몸이 오온(五蘊)의 거짓 화합인 줄 알아 아(我)에 대한 모든 집착을 떠나 깨달은 것과 비슷하긴 하나 아직 사물(법 = 法)의 참다운 바탕은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이것도 완전한 깨달음은 아니다. 그러므로 깨달음과 비슷하다는 뜻에서 상사각(相似覺)이라고 한다.
(3)수분각(隨分覺) : 십지(十地)가운데서 초지(初地)로 부터 구지(九地)까지의 법신(法身) 보살(菩薩)들이 법(法)의 이치마져 깨달아 객관(客觀)인 물(物). 심(心) 현상을 실재하는 것인양 잘못 알아 집착하는 법집(法執)마져 끊었으나 하지만 아직은 진여(眞如)와 합일(合一)된 상턔는 아니다. 법신보살(法身菩薩)이란 보살(菩薩)의 수행(修行) 단계(段階)를 열가지로 나눈 십지(十地)의 의론에 의하면 이 십지(十地)의 수행단계(修行段階)를 가는 보살(菩薩)은 어느 단계(段階)에 있건 각자(各者)의 분(分)에 따라 진여(眞如) 즉 법신(法身)의 이치를 깨달라 가는 까닭에 이르는 말이다. 그러므로 수분각(隨分覺)이라는 것은 곧 분(分)에 떠라 깨달아 가는 것이란 뜻에서 이름한 것이다.
(4)구경각(究竟覺) : 보살(菩薩)이 전단계(前段階)의 수행(修行)을 마치고 십지(十地)에 올라 십바라밀(十波羅密)의 수행(修行)을 구족(具足)하여 미계(迷界)의 근본인 근본무명(根本無明)의 심성(心性)을 보고 진여(眞如)에 돌아가 합일(合一)된 자리를 말한다. 여기에 으르면 다시 더 깨달을 것이 없는 온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므로 구경각(究竟覺)이라 한다. 이상이 미계(迷界)로 하향유전(下向流轉)하였던 범부(凡夫) 중생(衆生)들이 오계(悟界)로 상향환멸(上向還滅)하는 과정(過程)을 네가지로 나누어 설하신 시각4위(始覺四位)이거니와 결국 이렇게 구경각(究竟覺)에 이르면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각(覺)과 두가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번뇌(煩惱)로 덮혀 있던 본래의 각(覺 = 본각(本覺)이 나타날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본각(本覺)>을 가지고 그의 성질에 따라 두가지로 나눈다면
ㄱ. 수염본각(隨染本覺)은 일단 번뇌(煩惱)로 물들었다가 시각(始覺)의 과정(過程)을 거쳐 비로소 얻어졌다은 의미에서의 각(覺)을 말함이요.
ㄴ. 성정본각(性淨本覺)이란 본래 갖추어 가지고 있었던 깨끗한 각(覺)이라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상으로 진여연기론(眞如緣起論)에 대한 고찰을 마치나 우리가 범부(凡夫) 중생(衆生)이라는 것을 자인(自認)한다면 본각(本覺)이 있음을 믿고 시각(始覺)의 4위(四位)를 따라 한시라도 빨리 실천수행으로 옮길 때만이 그만큼 빨리 성불(成佛)의 길은 열릴 것이다. 결코 번뇌(煩惱)는 가득한 체 생각만이 부처가 된 듯 착각하여 전로(前路)에 수행(修行)이 없으면 그 언제 중생(衆生)을 면하여 고해(苦海)를 원리(遠離)하겠느가
우리 중생(衆生)은 어쨌거나 미계(迷界)에 떨어져 있다. (하향유전 = 下向流轉), 그리고 우리는 또한 한시라도 빨리 오계(悟界)로 되돌아가야 한다. (상향환멸 = 上向還滅), 만일 우리가 오계(悟界)로 되돌아갈 수 없다면, 즉 고해(苦海)의 중생(衆生)을 면할수 없다면 그 어느 가르침도 우리에겐 하등의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무명(無明)이 진여(眞如)를 가려 유전(流轉) 하였다면 무명(無明)을 없애면 진여(眞如)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해(일 =日)가 구름에 가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 성현(聖賢)은 무명(無明)으로 인한 번뇌(煩惱)의 구름이 아주 얇거나 없는 것이요 중생(衆生)은 그 구름이 두꺼울 뿐이다. 따라서 문제는 진여(眞如) 그 자체가 아니라 본래의 그 자리로 어떻게 되돌아 가느냐 하는 것이다. 환멸(還滅)이란 미계(迷界)에서 차츰 오계(悟界)로 깨달아가는 것이니 이것을 시각(始覺)이라 하는것 이것에는 다음과 같은 네가지가 있어 이것을 시각사위(始覺四位)라고 한다.
(1). 범부각(凡夫覺) : 중생(衆生)들이 깨달아 들어가는 첫 과정(過程)으로 성현(聖賢)들의 가르침에 의하여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의 인과도리(因果道理)를 자각하고 고통이 두려워 악업(惡業)을 짓지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 상태에선 인과(因果)의 도리(道理)를 자각하고 고통이 두려워 악(惡)을 짓지 않을 뿐 번뇌(煩惱)를 끊을만한 지혜(智慧)가 일어난 것이 않이기에 번뇌(煩惱)를 끊는 적극성이란 아직 없고 엄격한 의미에선 <깨달음>이라 할 수 없어 이것을 또한 불각(不覺)이라고 한다.
(2). 상사각(相似覺) : 성문(聲聞) 연각(緣覺)의 이승(二乘)과 대승(大乘)의 삼현(三賢 =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양(十廻向)의 보살(菩薩)들이 아공(我空)의 이치를 깨달아 아집(我執)을 떠난 것을 말한다. 그러나 바로 이몸이 오온(五蘊)의 거짓 화합인 줄 알아 아(我)에 대한 모든 집착을 떠나 깨달은 것과 비슷하긴 하나 아직 사물(법 = 法)의 참다운 바탕은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이것도 완전한 깨달음은 아니다. 그러므로 깨달음과 비슷하다는 뜻에서 상사각(相似覺)이라고 한다.
(3)수분각(隨分覺) : 십지(十地)가운데서 초지(初地)로 부터 구지(九地)까지의 법신(法身) 보살(菩薩)들이 법(法)의 이치마져 깨달아 객관(客觀)인 물(物). 심(心) 현상을 실재하는 것인양 잘못 알아 집착하는 법집(法執)마져 끊었으나 하지만 아직은 진여(眞如)와 합일(合一)된 상턔는 아니다. 법신보살(法身菩薩)이란 보살(菩薩)의 수행(修行) 단계(段階)를 열가지로 나눈 십지(十地)의 의론에 의하면 이 십지(十地)의 수행단계(修行段階)를 가는 보살(菩薩)은 어느 단계(段階)에 있건 각자(各者)의 분(分)에 따라 진여(眞如) 즉 법신(法身)의 이치를 깨달라 가는 까닭에 이르는 말이다. 그러므로 수분각(隨分覺)이라는 것은 곧 분(分)에 떠라 깨달아 가는 것이란 뜻에서 이름한 것이다.
(4)구경각(究竟覺) : 보살(菩薩)이 전단계(前段階)의 수행(修行)을 마치고 십지(十地)에 올라 십바라밀(十波羅密)의 수행(修行)을 구족(具足)하여 미계(迷界)의 근본인 근본무명(根本無明)의 심성(心性)을 보고 진여(眞如)에 돌아가 합일(合一)된 자리를 말한다. 여기에 으르면 다시 더 깨달을 것이 없는 온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므로 구경각(究竟覺)이라 한다. 이상이 미계(迷界)로 하향유전(下向流轉)하였던 범부(凡夫) 중생(衆生)들이 오계(悟界)로 상향환멸(上向還滅)하는 과정(過程)을 네가지로 나누어 설하신 시각4위(始覺四位)이거니와 결국 이렇게 구경각(究竟覺)에 이르면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각(覺)과 두가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번뇌(煩惱)로 덮혀 있던 본래의 각(覺 = 본각(本覺)이 나타날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본각(本覺)>을 가지고 그의 성질에 따라 두가지로 나눈다면
ㄱ. 수염본각(隨染本覺)은 일단 번뇌(煩惱)로 물들었다가 시각(始覺)의 과정(過程)을 거쳐 비로소 얻어졌다은 의미에서의 각(覺)을 말함이요.
ㄴ. 성정본각(性淨本覺)이란 본래 갖추어 가지고 있었던 깨끗한 각(覺)이라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상으로 진여연기론(眞如緣起論)에 대한 고찰을 마치나 우리가 범부(凡夫) 중생(衆生)이라는 것을 자인(自認)한다면 본각(本覺)이 있음을 믿고 시각(始覺)의 4위(四位)를 따라 한시라도 빨리 실천수행으로 옮길 때만이 그만큼 빨리 성불(成佛)의 길은 열릴 것이다. 결코 번뇌(煩惱)는 가득한 체 생각만이 부처가 된 듯 착각하여 전로(前路)에 수행(修行)이 없으면 그 언제 중생(衆生)을 면하여 고해(苦海)를 원리(遠離)하겠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