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淨土)의 소재(所在)
구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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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6 07:15
3. 정토(淨土)의 소재(所在)
그렇다면 정토(淨土)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제 다음의 대화를 들어 보자. 보살(菩薩)이 성불(成佛)할 때에 아첨하지 않고 공덕(功德)이 구족(具足)하고 대승(大乘)을 행(行)하는 등의 중생(衆生)이 그 나라에 와서 나고 또 깨끗한 마음을 따라서 곧 불토(佛土)가 깨끗하여 진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자 사리불(舍利弗)은 그러나 어쨌던 이 현실(現實)의 사바세계(娑婆世界)는 예토(穢土)가 아닌가 하는 의문에 이렇게 생각했다. <마약 보살(菩薩)의 마음이 깨끗하여 불토(佛土)가 깨끗하여진다면 우리 부처님은 본래 보살(菩薩)이 되었을 때 마음이 얼마나 깨끗지 못했으면 이 불토(佛土)가 이렇게 깨끗지 못한가.> 이것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이 뜻을 아시고 해와 달을 장님이 못 보는 것은 해와 달이 깨끗지 못하거나 밝지못한 허물이 아니라 장님의 눈어두운 허물이듯이 여래(如來)의 국토(國土)가 깨끗하게 장엄(莊嚴)된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여래(如來)의 허물이 아니라 중생(衆生)의 죄과(罪過)로 인해서 라고 말씀하시고 <나는 이 땅이 깨끗한데 너는 보지 못하는 구나.> 하셨다. 그 때에 나계범왕(螺䯻梵王)은 이 말씀을 듣고 사리불(舍利弗)에게 자기가 보기엔 이 땅이 자재천궁(自在天宮)과 같다고 하였으나 사리불(舍利弗)은 여전히 이 땅은 언덕 구덩 산 개울 등의 더러운 것으로 차 있어 보인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범왕(梵王)은 그의 말을 받아 그대의 마음에 높고 낮음이 있어 부처님의 지혜(智慧)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이 땅을 깨끗치 않다고 하는 것이지 부처님의 지혜(智慧)에 의지하면 곧 능히 이 불토(佛土)가 깨끗한 것을 볼 수 있으리라고 하였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발가락으로 땅을 누르자 깨끗이 장엄(莊嚴)된 국토(國土)를 보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불토(佛土)는 항상 깨끗하기 이와 같으나 근기 얕은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이 여러가지 나쁜 국토(國土)를 보이게 된 것이니. . . . . 그러므로 사리불(舍利弗)아 사람의 마음이 깨끗해지면 곧 이 땅의 공덕장엄(功德莊嚴)을 볼 것이다.> 불토(佛土)란 항상 깨끗한 것인데 어찌 발가락으로 누름으로 인해 별안간 보배로 장엄(莊嚴)된 국토(國土)로 변하겠는가. 이것은 이승(二乘)을 위한 방편이이니라. 사바국토(娑婆國土)는 항상 깨끗하면서도 더러운 것이니 더러운 자는 스스로가 더러워서 깨끗한 것인 줄 알지 못하고 깨끗한 자는 스스로 깨끗하여 더러운 것을 알지 못하므로 염정(染淨)이 어찌 땅에 관계되는 것인가. 염정(染淨)은 오로지 사람에게 관계되는 것이다. 봄의 푸른 잔디밭도 다정한 연인에겐 아름다운 초원이지만 도둑에겐 몸을 숨길 곳 없으니 어찌 그것이 아름다움으로 보이겠는가. 그러니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지면 그 곳이 바로 정토라. 온갖 선행(善行)을 닦아가는 정심(淨心)의 보살(菩薩)들이 사는 곳의 연못에는 백화가 만발한 가운데 맑은 물에 고기들이 한가롭게 놀 것이요 염심(染心)의 중생(衆生)들이 사는 곳의 연못엔 쓰레기로 악취가 풍기리라. 실로 정토란 교화를 받고 바른 길로 인도된 사람의 다소에 따라 그 넓이가 결정되늩 것이라 하겠다. 우리는 이것으로써 왜 유마(維摩)가 정토(淨土)에 있으면서도 예토(穢土)를 떠나지 않고 예토(穢土)에 있으면서도 정토(淨土)를 떠나지 않으며 중생교화(衆生敎化)를 그의 사명으로 하였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마음을 밝혀 이 땅에 정토(淨土)를 건설할 생각을 안 하고 마음은 더러운 체 버려두고 어디 딴 곳의 정토만을 찾으려 하는가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자. 정토(淨土)는 바로 이 곳이다. 유마경(維摩經)은 우리에게 이런 차방정토설(此方淨土說)을 알려 주어 이 곳을 바로 정토로 만들 것을 간절히 권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반야경(般若經)의 차방불토설(此方佛土說)과도 통하는 것이다. 정토의 건설자는 바로 우리의 마음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토(淨土)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제 다음의 대화를 들어 보자. 보살(菩薩)이 성불(成佛)할 때에 아첨하지 않고 공덕(功德)이 구족(具足)하고 대승(大乘)을 행(行)하는 등의 중생(衆生)이 그 나라에 와서 나고 또 깨끗한 마음을 따라서 곧 불토(佛土)가 깨끗하여 진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자 사리불(舍利弗)은 그러나 어쨌던 이 현실(現實)의 사바세계(娑婆世界)는 예토(穢土)가 아닌가 하는 의문에 이렇게 생각했다. <마약 보살(菩薩)의 마음이 깨끗하여 불토(佛土)가 깨끗하여진다면 우리 부처님은 본래 보살(菩薩)이 되었을 때 마음이 얼마나 깨끗지 못했으면 이 불토(佛土)가 이렇게 깨끗지 못한가.> 이것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이 뜻을 아시고 해와 달을 장님이 못 보는 것은 해와 달이 깨끗지 못하거나 밝지못한 허물이 아니라 장님의 눈어두운 허물이듯이 여래(如來)의 국토(國土)가 깨끗하게 장엄(莊嚴)된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여래(如來)의 허물이 아니라 중생(衆生)의 죄과(罪過)로 인해서 라고 말씀하시고 <나는 이 땅이 깨끗한데 너는 보지 못하는 구나.> 하셨다. 그 때에 나계범왕(螺䯻梵王)은 이 말씀을 듣고 사리불(舍利弗)에게 자기가 보기엔 이 땅이 자재천궁(自在天宮)과 같다고 하였으나 사리불(舍利弗)은 여전히 이 땅은 언덕 구덩 산 개울 등의 더러운 것으로 차 있어 보인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범왕(梵王)은 그의 말을 받아 그대의 마음에 높고 낮음이 있어 부처님의 지혜(智慧)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이 땅을 깨끗치 않다고 하는 것이지 부처님의 지혜(智慧)에 의지하면 곧 능히 이 불토(佛土)가 깨끗한 것을 볼 수 있으리라고 하였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발가락으로 땅을 누르자 깨끗이 장엄(莊嚴)된 국토(國土)를 보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불토(佛土)는 항상 깨끗하기 이와 같으나 근기 얕은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이 여러가지 나쁜 국토(國土)를 보이게 된 것이니. . . . . 그러므로 사리불(舍利弗)아 사람의 마음이 깨끗해지면 곧 이 땅의 공덕장엄(功德莊嚴)을 볼 것이다.> 불토(佛土)란 항상 깨끗한 것인데 어찌 발가락으로 누름으로 인해 별안간 보배로 장엄(莊嚴)된 국토(國土)로 변하겠는가. 이것은 이승(二乘)을 위한 방편이이니라. 사바국토(娑婆國土)는 항상 깨끗하면서도 더러운 것이니 더러운 자는 스스로가 더러워서 깨끗한 것인 줄 알지 못하고 깨끗한 자는 스스로 깨끗하여 더러운 것을 알지 못하므로 염정(染淨)이 어찌 땅에 관계되는 것인가. 염정(染淨)은 오로지 사람에게 관계되는 것이다. 봄의 푸른 잔디밭도 다정한 연인에겐 아름다운 초원이지만 도둑에겐 몸을 숨길 곳 없으니 어찌 그것이 아름다움으로 보이겠는가. 그러니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지면 그 곳이 바로 정토라. 온갖 선행(善行)을 닦아가는 정심(淨心)의 보살(菩薩)들이 사는 곳의 연못에는 백화가 만발한 가운데 맑은 물에 고기들이 한가롭게 놀 것이요 염심(染心)의 중생(衆生)들이 사는 곳의 연못엔 쓰레기로 악취가 풍기리라. 실로 정토란 교화를 받고 바른 길로 인도된 사람의 다소에 따라 그 넓이가 결정되늩 것이라 하겠다. 우리는 이것으로써 왜 유마(維摩)가 정토(淨土)에 있으면서도 예토(穢土)를 떠나지 않고 예토(穢土)에 있으면서도 정토(淨土)를 떠나지 않으며 중생교화(衆生敎化)를 그의 사명으로 하였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마음을 밝혀 이 땅에 정토(淨土)를 건설할 생각을 안 하고 마음은 더러운 체 버려두고 어디 딴 곳의 정토만을 찾으려 하는가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자. 정토(淨土)는 바로 이 곳이다. 유마경(維摩經)은 우리에게 이런 차방정토설(此方淨土說)을 알려 주어 이 곳을 바로 정토로 만들 것을 간절히 권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반야경(般若經)의 차방불토설(此方佛土說)과도 통하는 것이다. 정토의 건설자는 바로 우리의 마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