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서 사제십육찰라(四諦十六刹那)
구경사
0
319
01.24 10:49
이에서 사제십육찰라(四諦十六刹那)를 성제현관(聖諦現觀)이라 하는 이유는 무루지(無漏智)로써 바로 사성제(四聖諦)를 평등히 각지(覺知)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상하 팔제(上下 八諦)엔 각기 혹(惑 = 번뇌(煩惱)의 증멸(增滅)이 있으니 그 이유에 대해선
1. 신견(身見)과 변견(邊見)이 고제하(苦諦下)에만 있는 이유는 신견(身見)은 원래 삼계(三界)의 고과(苦果)인 오온화합(五蘊和合)의 가신(假身)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요 또 변견(邊見)은 이 신견(身見)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요.
2.계금취견(戒禁取見)이 고제(苦諦)와 도제(道諦)의 이제하(二諦下)에만 있는 이유는 계금취견(戒禁取見)에는 모든 바른 인(因)이 아닌 것을 바른 인(因)이라고 고집하는 비인계인(非因計因)과 모든 바른 도(道)가 아닌 것을 바른 도(道)라고 고집하는 비도계도(非道計道)의 두 가지가 있는 바 비인계인(非因計因)중에 대범천(大梵天) 등을 우주(宇宙) 만물(萬物)의 영원(永遠)하고도 유일한 근본 원리인 실체로 오인하여 이것을 망령되게 집착하거나 또는 소(우 = 牛)같은 것을 위하는 것이 하늘에 나는 인(因)이라고 망집(妄執)하는 것 등은 모두 고과(苦果)에 미혹(迷惑)되어 일어나는 것이므로 고제하(苦諦下)에 들며 비도 계도(非道 計道)중에 유루(有漏)의 오계(五戒) 십선계(十善戒) 등을 무루(無漏) 해탈(解脫)의 도(道)라고 집착하는 것 등은 고과(苦果)에 미혹(迷惑)하는 것이므로 이런 것도 고제하(苦諦下)에 들어가며 그 바른 도(道)가 아닌것을 가지고 열반(涅槃)의 도(道)라고 고집하는 것은 도제(道諦)에 들기 때문이라고 하며
3. 상이계(上二界)에 진(瞋)이 없는 것은 이 세계(世界)는 그 과보(果報)가 즐겁고 자유스런 생활을 하게 되는 곳이므로 진(瞋)을 일으킬 기회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음 각(各) 제하(諦下)에 혹(惑)이 있게 되는 이유에 대해 이해를 돕고자 그 과정을 고제(苦諦)를 예로 들어 알아보면, 먼저 무명(無明 = 치(痴)이 사제(四諦)의 이치 즉 고제(苦諦) 내지 도제(道諦)의 이치를 관(觀)하여 완전히 알지 못함에 여기에서 정말로 고(苦)인가 아닌가 하는 의(疑)가 생기고 그리하여 이런 의(疑)를 가진 끝에 어떤 결정을 내리면 이것이 곧 사견(邪見)이 되고 이 사견(邪見)은 곧 오온가합(五蘊假合)이란 몸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이것이 신견(身見)을 이끌어 와 상주(常住)니 단멸(斷滅)이니 하는 일방적인 변견(邊見)을 낳게 되고 이 변견(邊見)은 곧 이렇다 또는 이래야 한다 하는 계금취견(戒禁取見)을 낳게 되며 이런 계금취견(戒禁取見)은 다시 그것이 옳다고 하여 견취견(見取見)을 내게 된다. 이렇게 하여 스스로의 견해에 깊은 애착을 갖게 되니 이것이 <탐(貪)> 을 낳게 되는 것이며 이것으로 인해 스스로 자만심이 생기게 되니 이것이 <만(慢)>이며 이것으로 인해 남의 견해가 자기의 것과 다를 때에는 곧 그에 대해 참지 못하고 성을 내게 되니 이것이 <진(瞋)>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순서는 꼭 정해진 것은 아니며 그 중에는 어느 것을 초월(超越)하여 생기기도 하며 그저 대체로 이와 같은 순서로 생긴다고 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위의 팔십팔혹(八十八惑)은 모두 사제하(四諦下)에서 생기는 것으로 사제(四諦)의 이치를 완전히 알면 다 끊을 수 있는 것이므로 견도(見道)에서 끊어저 버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탐(貪), 진(瞋), 치(痴), 만(慢)이 비록 수혹(修惑)이긴 하나 견도하(見道下)의 그것들은 사제(四諦)에 어두어 일어나는 것이므로 이것은 견혹(見惑)이라 하는 것이 타당하겠다. 이 사제하(四諦下)의 모든 번뇌(煩惱)를 끊어 버리는 견도십오찰라간(見道十五刹那間)을 예유향(豫流向)이라고 한다. 예유(預流)는 입류(入流)라고도 하니 무루도(無漏道)를 처음 보아 처음으로 성류 (聖流)에 참가하였다는 뜻이다. 이 예류성자(豫流聖者) 이상은 다 향(向)과 과(果)가 있는데 향(向)은 다 처음으로 그 지위(地位)에 들어왔다는 뜻이요. 과(果)는 그 지위(地位)를 마쳤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사제십육찰나(四諦十六刹那)의 마지막이요. 수도(修道)의 처음엔 제십육심(第十六心)인 예류과(豫流果 = 수다원과(須陀洹果)가 되는 것이다.
1. 신견(身見)과 변견(邊見)이 고제하(苦諦下)에만 있는 이유는 신견(身見)은 원래 삼계(三界)의 고과(苦果)인 오온화합(五蘊和合)의 가신(假身)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요 또 변견(邊見)은 이 신견(身見)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요.
2.계금취견(戒禁取見)이 고제(苦諦)와 도제(道諦)의 이제하(二諦下)에만 있는 이유는 계금취견(戒禁取見)에는 모든 바른 인(因)이 아닌 것을 바른 인(因)이라고 고집하는 비인계인(非因計因)과 모든 바른 도(道)가 아닌 것을 바른 도(道)라고 고집하는 비도계도(非道計道)의 두 가지가 있는 바 비인계인(非因計因)중에 대범천(大梵天) 등을 우주(宇宙) 만물(萬物)의 영원(永遠)하고도 유일한 근본 원리인 실체로 오인하여 이것을 망령되게 집착하거나 또는 소(우 = 牛)같은 것을 위하는 것이 하늘에 나는 인(因)이라고 망집(妄執)하는 것 등은 모두 고과(苦果)에 미혹(迷惑)되어 일어나는 것이므로 고제하(苦諦下)에 들며 비도 계도(非道 計道)중에 유루(有漏)의 오계(五戒) 십선계(十善戒) 등을 무루(無漏) 해탈(解脫)의 도(道)라고 집착하는 것 등은 고과(苦果)에 미혹(迷惑)하는 것이므로 이런 것도 고제하(苦諦下)에 들어가며 그 바른 도(道)가 아닌것을 가지고 열반(涅槃)의 도(道)라고 고집하는 것은 도제(道諦)에 들기 때문이라고 하며
3. 상이계(上二界)에 진(瞋)이 없는 것은 이 세계(世界)는 그 과보(果報)가 즐겁고 자유스런 생활을 하게 되는 곳이므로 진(瞋)을 일으킬 기회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음 각(各) 제하(諦下)에 혹(惑)이 있게 되는 이유에 대해 이해를 돕고자 그 과정을 고제(苦諦)를 예로 들어 알아보면, 먼저 무명(無明 = 치(痴)이 사제(四諦)의 이치 즉 고제(苦諦) 내지 도제(道諦)의 이치를 관(觀)하여 완전히 알지 못함에 여기에서 정말로 고(苦)인가 아닌가 하는 의(疑)가 생기고 그리하여 이런 의(疑)를 가진 끝에 어떤 결정을 내리면 이것이 곧 사견(邪見)이 되고 이 사견(邪見)은 곧 오온가합(五蘊假合)이란 몸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이것이 신견(身見)을 이끌어 와 상주(常住)니 단멸(斷滅)이니 하는 일방적인 변견(邊見)을 낳게 되고 이 변견(邊見)은 곧 이렇다 또는 이래야 한다 하는 계금취견(戒禁取見)을 낳게 되며 이런 계금취견(戒禁取見)은 다시 그것이 옳다고 하여 견취견(見取見)을 내게 된다. 이렇게 하여 스스로의 견해에 깊은 애착을 갖게 되니 이것이 <탐(貪)> 을 낳게 되는 것이며 이것으로 인해 스스로 자만심이 생기게 되니 이것이 <만(慢)>이며 이것으로 인해 남의 견해가 자기의 것과 다를 때에는 곧 그에 대해 참지 못하고 성을 내게 되니 이것이 <진(瞋)>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순서는 꼭 정해진 것은 아니며 그 중에는 어느 것을 초월(超越)하여 생기기도 하며 그저 대체로 이와 같은 순서로 생긴다고 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위의 팔십팔혹(八十八惑)은 모두 사제하(四諦下)에서 생기는 것으로 사제(四諦)의 이치를 완전히 알면 다 끊을 수 있는 것이므로 견도(見道)에서 끊어저 버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탐(貪), 진(瞋), 치(痴), 만(慢)이 비록 수혹(修惑)이긴 하나 견도하(見道下)의 그것들은 사제(四諦)에 어두어 일어나는 것이므로 이것은 견혹(見惑)이라 하는 것이 타당하겠다. 이 사제하(四諦下)의 모든 번뇌(煩惱)를 끊어 버리는 견도십오찰라간(見道十五刹那間)을 예유향(豫流向)이라고 한다. 예유(預流)는 입류(入流)라고도 하니 무루도(無漏道)를 처음 보아 처음으로 성류 (聖流)에 참가하였다는 뜻이다. 이 예류성자(豫流聖者) 이상은 다 향(向)과 과(果)가 있는데 향(向)은 다 처음으로 그 지위(地位)에 들어왔다는 뜻이요. 과(果)는 그 지위(地位)를 마쳤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사제십육찰나(四諦十六刹那)의 마지막이요. 수도(修道)의 처음엔 제십육심(第十六心)인 예류과(豫流果 = 수다원과(須陀洹果)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