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개고인(
구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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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8 07:56
3.일체개고인(一切皆苦印) : 일체개고(一切皆苦)라 함은 모든 것은 다 고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인 객관적 존재를 존재 그대로 놓고 본다면 그것은 고통이 될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객관적 존재가 고통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그것은 이것에 크개 다음과 같은 두가지 종류의 주관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ㄱ.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인 존재를 놓고 유상(有常)이요 유아(有我)이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것은 중생의 헛된 욕망이다. 아무리 헛된 사물에 대하여 좋아하는 마음을 내고 영원히 붙잡아 두려고 해도 그러는 자신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것은 반드시 떨어져 나간다. 그러므로 중생은 이 욕망의 불만족으로 인하여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인 것에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이던 정신적인 것이던 마찬가지이다. 재물이나 권력 등을 영원히 자기 것인양 허욕에 사료잡혀 동분서주(東奔西走)하다가 패가망신(敗家亡身)하는 이유도 다 여기에 있는 것이라 하겠다.
ㄴ.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인 존재를 놓고 무상(無常). 무아(無我) 그 자체에 빠져 어차피 무상(無常)이요 무아(無我)라 하여 모든 것에 희망을 잃어버리거나 자포자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끔 <인생(人生)은 무상(無常)하다.>하고 탄식하거나 순간적이나마 염새주의에 사로잡히거나 하는 사람을 볼수 있다. 이런 순간 그 사람에겐 모든 것이 귀찮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나타나질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며 따라서 이것이 계속되면 될수록 그의 생(生)이란 점점 더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저들게 될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위에서 말한 두가지 이유는 모두 다 극단에 치우친 것으로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도리(道理)를 제대로 살려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도리를 가장 적절하게 살려나가야만 한다. 이것도 물론 우리 인생이 무상(無常)이요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리라. 우리 인생은 무상(無常)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서글픈 감정을 유발하거나 눈물을 글썽이게 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생이 무상(無常)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도 모른다. 만일 인생이 유상(有常)하고 유아(有我)하다면 우리는 아무런 진보나 발전의 여지도 없이 언제까지나 이런 고통받는 중생인 인간으로서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인생 또한 무상(無常) 이며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그리고 또 고(苦)라는 것도 무상(無常)이요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룩한 인연(因緣)을 잘 관찰하여 그 인(因)과 연(緣) 을 제거함으로써 고통받는 중생으서로 남아있지 않고 해탈(解脫)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일체개고인(一切皆苦印)이라는 것은 위에 말한 두가지의 극단에 걸려 있는 중생계에서는 어쩔 수 없는 필연의 법칙이 되겠지만 그것을 떠난 세계에서는 하등 필요가 없는 단안(斷案)인 것으로 이런 면으로 볼 때에는 빠져도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삼법인(三법印)을 말할 때에는 미혹(迷惑)의 중생계 입장에 서서 현실을 판단한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 일체개고(一切皆苦)는 12연기설(十二緣起說)로 보면 순관(順觀)에 해당한다고 하겠다.(계속)
ㄱ.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인 존재를 놓고 유상(有常)이요 유아(有我)이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것은 중생의 헛된 욕망이다. 아무리 헛된 사물에 대하여 좋아하는 마음을 내고 영원히 붙잡아 두려고 해도 그러는 자신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것은 반드시 떨어져 나간다. 그러므로 중생은 이 욕망의 불만족으로 인하여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인 것에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이던 정신적인 것이던 마찬가지이다. 재물이나 권력 등을 영원히 자기 것인양 허욕에 사료잡혀 동분서주(東奔西走)하다가 패가망신(敗家亡身)하는 이유도 다 여기에 있는 것이라 하겠다.
ㄴ.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인 존재를 놓고 무상(無常). 무아(無我) 그 자체에 빠져 어차피 무상(無常)이요 무아(無我)라 하여 모든 것에 희망을 잃어버리거나 자포자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끔 <인생(人生)은 무상(無常)하다.>하고 탄식하거나 순간적이나마 염새주의에 사로잡히거나 하는 사람을 볼수 있다. 이런 순간 그 사람에겐 모든 것이 귀찮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나타나질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며 따라서 이것이 계속되면 될수록 그의 생(生)이란 점점 더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저들게 될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위에서 말한 두가지 이유는 모두 다 극단에 치우친 것으로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도리(道理)를 제대로 살려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도리를 가장 적절하게 살려나가야만 한다. 이것도 물론 우리 인생이 무상(無常)이요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리라. 우리 인생은 무상(無常)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서글픈 감정을 유발하거나 눈물을 글썽이게 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생이 무상(無常)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도 모른다. 만일 인생이 유상(有常)하고 유아(有我)하다면 우리는 아무런 진보나 발전의 여지도 없이 언제까지나 이런 고통받는 중생인 인간으로서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인생 또한 무상(無常) 이며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그리고 또 고(苦)라는 것도 무상(無常)이요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룩한 인연(因緣)을 잘 관찰하여 그 인(因)과 연(緣) 을 제거함으로써 고통받는 중생으서로 남아있지 않고 해탈(解脫)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일체개고인(一切皆苦印)이라는 것은 위에 말한 두가지의 극단에 걸려 있는 중생계에서는 어쩔 수 없는 필연의 법칙이 되겠지만 그것을 떠난 세계에서는 하등 필요가 없는 단안(斷案)인 것으로 이런 면으로 볼 때에는 빠져도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삼법인(三법印)을 말할 때에는 미혹(迷惑)의 중생계 입장에 서서 현실을 판단한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 일체개고(一切皆苦)는 12연기설(十二緣起說)로 보면 순관(順觀)에 해당한다고 하겠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