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일에 충성(忠誠)하고
구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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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5 08:56
나라 일에 충성(忠誠)하고 사회에 봉사하고 맡은 바 직책에 충실(忠實)하고 가정을 원만(圓滿)하게 이끌어 나가면서 화두(話頭)는 잊지 아니하고 언제 어디서나 어떤 경계에서라도 소소(昭昭)하게 간직하게 되는 것이다. 화두를 가지는 것이 일상생활에 조금도 방해가 되는 일이 없고 오히려 모든 일에 충실해도 화두(話頭)는 생생(生生)하게 되는 것이다. 공부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에 심야(深夜)에 잠을 자지 말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계속해야 하며 낮에는 낮대로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일상생활을 하여도 조금도 지장이 없게 된다. 용맹정진을 한다는 것은 일체심(一切心)을 완전히 쉬게 하는 것이니 낮일에 조금도 고단하거나 피로하지 않을 것이고 도리어 정신(精神)은 더욱 맑아서 일이 더 잘 되는 것이다. 한달 두달 석달 할 것 없이 견성성불(見性成佛)할 때까지 용맹정진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화두를 타파해야 하는데 화두를 타파하자니 잠을 적게자고 정진을 해야 화두가 타파되는 것이다. 중도에 좌절하는 일이 있으면 견성성불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화두를 타파하지 않고서는 견성성불을 못하는 것이다. 화두를 타파하자면 필연적으로 용맹정진을 계속할 수 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선지식(善知識)의 가르침을 받고 한편으로는 용먱정진을 계속하고 하면 반드시 견성성불하게 되어 있다. 견성성불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구경에 가서는 용맹정진에 들어가야만 승부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상과 같이 자신의 알음알이 에 얽매여 있어도 안되고 경전(經典)의 문자(文字)에 얽매여서도 안되는 것이다. 또 계율(戒律)에 묶여 있어서도 안되며 법(法)에 묶여 있어서도 안되고 부처에 얽매여서도 안되며 승(僧)이다 속(俗)이다 하는 관념에 묶여 있어서도 안되는 것이다. 털끝만치라도 어디엔가에 마음이 묶여 있거나 얽매임이 있으면 그것이 장애(障礙)가 되어 가로 막게 되는 것이다. 일체의 경계에 무주무착(無住無着)해서 오직 자성(自性) 밝히는 수행(修行)에만 전념해야 한다. 이와 같이 대추나무에 연줄 얽히듯이 이렇게 많은 곳에 얽혀 있어서야 어떻게 불도를 닦아 증득할 수가 있겠는가. 또 어떻게 불도를 닦을 수가 있겠으며 이래서야 어떻게 이무애(理無碍) 사무애(事無碍) 이사무애(理事無碍) 사사무애(事事無碍)의 경지에 들 수가 있겠는가. 도저히 안될 말이다. 티끌만치라도 얽매인 것이 있으면 불도를 성취할 수가 없는 법이다. 이렇게 많은 곳에 얽혀 있어서야 이것은 묶여 있는 것이지 어떻게 일체 무애의 해탈경지에 이를 수가 있겠는가. 불법(佛法)의 근본(根本)은 동체평등(同體平等)에 있는 것이요 불법(佛法)의 대본(大本)은 무주무착(無住無着)에 있는 것이며 응무소주이생기심 (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야 하는 것이다. 운문선사(雲門禪師)같은 분은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하신데 대하여 내가 그 당시에 있었더라면 석가모니를 때려 잡아서 주린 개에게나 줄 것을 하셨다. 여기에 있어서 부처에 묶여 있는 중생(衆生)들은 기절초풍했을 것이요 겁이 나고 죄스러워서 아마 석달열흘 앓아누웠을 것이다. 운문선사를 때려 잡아야 된다고 아우성 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양 그대로가 온누리의 주인공(主人公)이요 그양 그대로가 불성(佛性)인데 새삼스럽게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평지풍파를 일으켰다고 후세중생(後世衆生)들을 개오(開悟)시키기 위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경계하신 것이다. 어느 선사(禪師)는 부처에 묶여서 꼼짝 달싹을 못하는 스님네들을 후세에 까지 길이 길이 건져 주고자 하는 대자대비(大慈大悲)한 간절한 마음으로 스님네들 앞에서 목불을 불태워 보임으로 부처에 얽매여 있는 병을 고쳐주고자 애쓰신 일이 있었다. 어떤 선사는 부처님의 경내에서 소변(小便)을 하면서 온누리가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법신(法身)인데 어디에 따로 소변할 곳이 있는가 하고 부처에 묶여 있는 병을 고쳐주고자 애를 쓰시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