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식(識)의 명칭(名稱)과 작용(作用)
구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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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1 13:23
졔2항(第二項) 모든 식(識)의 명칭(名稱)과 작용(作用)
그러면 이제 8식(八識)과 그 작용은 어떠한지 알아보기로 하자. 8식(八識)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아뢰야식(阿賴耶識)이 그것인데 이 중 안식(眼識)에서 부터 신식(身識)까지는 전5식(前五識)이라 하고 의식(意識)은 제6식(第六識) 말나식(末那識)은 제7식(第七識) 아뢰야식(阿賴耶識) 제8식(第八識)이라고도 한다.
1. 전5식(前五識) : 각기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을 인식할 뿐이다. 즉 색(色)을 인식하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알고 촉감을 느끼는 등의 단순한 감각작용을 할 뿐이다.
2. 의식(意識) : 앞의 오감(五感)처럼 감각기관을 의지하지 않고 다만 그들이 인식한 것에 대해 비교 추리 추억 등의 작용을 한다. 예를 들어 말하면 우리가 어떤 소리를 들었다면 듣는 그것만은 이식(耳識)이지만 그 소리가 어떤 소리인가 남자(男子)의 소리인가, 여자(女子)의 소리인가 등을 경험에 의해 분별 인식하는 것은 의식(意識)이 되는 것이다. 이상 6식(六識)의 특징은 모두가 외경(外境)에 대한 인식이요 요별(了別)이기에 이것 들을 외향식(外向識)이라 한다.
3. 말나식(末那識) : 말나(末那)는 범어(梵語)의 음역(音譯)인데 번역(飜譯)하면 의(意)라고 한다. 제6식(第六識)인 의식(意識)과 혼동될 우려가 있어서 원어(原語)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말나식(末那識)은 제8식(第八識)을 소의처(所依處)로 하여 아(我)다 법(法)이다 하고 집착(執着) 사량(思量)하는 사량식(思量識)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식(識)은 전6식(前六識)과 제8식(第八識)과의 중간에 있으면서 항상 제8식(第八識)을 대상으로 하여 그것이 바로 나의 주체라는 아집(我執)과 그것은 실존(實存)한다는 법집(法執)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제6식(第六識)은 이런 말나식(末那識)을 의지하여 여러가지 대상을 인식함에 실재(實在)하는듯 생각한다. 그러므로 결국 중생(衆生)은 이 아집(我執 = 인집(人執)과 법집(法執)에 의하여 모든 망상(妄想)이 생기고 악업(惡業)을 짓게 되어 생사(生死)의 윤회(輪廻)를 면치 못하는 것이니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끊으면 곧 망상(妄想)도 없음이라. 깨달음의 경지에 들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윤회(輪廻)도 그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제7말나식(第七末那識)과 상응(相應)하는 것으론 아치(我痴)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의 4번뇌(四煩惱)를 비롯한 도거(掉擧 = 정신을 흩으려 딴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마음 작용) 혼침(昏沈) 불신(不信) 부정지(不正知)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가 있다. 이것은 모두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이 한몸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말나식(末那識)이 존재(存在)하는 한계는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이 남아 있을 때 까지만이 되어 아집(我執). 법집(法執)을 끊은 경지에선 없는 것이 되니 이 때엔 어떻게 되는가가 문제이다. 이것에 관해선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이 남아 있는 한해서는 말나식(末那識)은 염오(染汚)의 말나(末那)로 존재(存在)하고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끊은 경지에선 제8식(第八識)도 염오성(染汚性)이 아니므로 평등성지(平等性智)를 일으킨다고 한다.
4. 아뢰야식(阿賴耶識) : 아뢰야(阿賴耶)는 범어(梵語)의 음역(音譯)으로 현장(玄奘)은 이것을 쌓아둔다는 뜻으로 보아 함장(含藏)이라 번역(飜譯)했고 진제(眞諦)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보아 무몰(無没)이라 번역(飜譯)한 바 있다. 결국 아뢰야식(阿賴耶識)이란 말은 우리가 시시각각 행(行)하는 업(業)은 그것에 따른 종자(種子)를 남기니 이 종자는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저장되어 없어지지 않음이라 창고에 물건을 저장해 두는 것과 같다는 뜻에서 명명(命名)된 것이다. 우리가 매일같이 하는 신(身) 구(口) 의(意)의 모든 행동은 그 낱낱의 행동마다 세력적인 종자(種子)가 아뢰야식(阿賴耶識) 가운데 저장되었다가 뒷 날 어느 때인가 인연(因緣)을 만나 다시 모든 세계(世界)를 전개 시키게 되는 것이다. 물론 아뢰야식(阿賴耶識)도 인연(因緣)으로 생기는 것이라 생멸적(生滅的)인 것엔 틀림 없으나 무시이래(無始以來)로 부터 아득한 미래(未來)를 향하여 끊임없이 현현(顯現)하되 제7식(第七識)의 활동에 의하여 자체 안에 간직해 두었던 선악(善惡)을 전개 시키니 이렇게 전개되기 시작한 선악(善惡)의 종자(種子)는 다시 제6식(第六識)의 선악업(善惡業)의 훈습력(熏習力)에 의해 다시 전개되어 삼계(三界) 육도(六道) 등의 세계를 전개 시키는 것이다. (계속)
祝願文
그러면 이제 8식(八識)과 그 작용은 어떠한지 알아보기로 하자. 8식(八識)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아뢰야식(阿賴耶識)이 그것인데 이 중 안식(眼識)에서 부터 신식(身識)까지는 전5식(前五識)이라 하고 의식(意識)은 제6식(第六識) 말나식(末那識)은 제7식(第七識) 아뢰야식(阿賴耶識) 제8식(第八識)이라고도 한다.
1. 전5식(前五識) : 각기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을 인식할 뿐이다. 즉 색(色)을 인식하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알고 촉감을 느끼는 등의 단순한 감각작용을 할 뿐이다.
2. 의식(意識) : 앞의 오감(五感)처럼 감각기관을 의지하지 않고 다만 그들이 인식한 것에 대해 비교 추리 추억 등의 작용을 한다. 예를 들어 말하면 우리가 어떤 소리를 들었다면 듣는 그것만은 이식(耳識)이지만 그 소리가 어떤 소리인가 남자(男子)의 소리인가, 여자(女子)의 소리인가 등을 경험에 의해 분별 인식하는 것은 의식(意識)이 되는 것이다. 이상 6식(六識)의 특징은 모두가 외경(外境)에 대한 인식이요 요별(了別)이기에 이것 들을 외향식(外向識)이라 한다.
3. 말나식(末那識) : 말나(末那)는 범어(梵語)의 음역(音譯)인데 번역(飜譯)하면 의(意)라고 한다. 제6식(第六識)인 의식(意識)과 혼동될 우려가 있어서 원어(原語)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말나식(末那識)은 제8식(第八識)을 소의처(所依處)로 하여 아(我)다 법(法)이다 하고 집착(執着) 사량(思量)하는 사량식(思量識)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식(識)은 전6식(前六識)과 제8식(第八識)과의 중간에 있으면서 항상 제8식(第八識)을 대상으로 하여 그것이 바로 나의 주체라는 아집(我執)과 그것은 실존(實存)한다는 법집(法執)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제6식(第六識)은 이런 말나식(末那識)을 의지하여 여러가지 대상을 인식함에 실재(實在)하는듯 생각한다. 그러므로 결국 중생(衆生)은 이 아집(我執 = 인집(人執)과 법집(法執)에 의하여 모든 망상(妄想)이 생기고 악업(惡業)을 짓게 되어 생사(生死)의 윤회(輪廻)를 면치 못하는 것이니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끊으면 곧 망상(妄想)도 없음이라. 깨달음의 경지에 들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윤회(輪廻)도 그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제7말나식(第七末那識)과 상응(相應)하는 것으론 아치(我痴)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의 4번뇌(四煩惱)를 비롯한 도거(掉擧 = 정신을 흩으려 딴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마음 작용) 혼침(昏沈) 불신(不信) 부정지(不正知)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가 있다. 이것은 모두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이 한몸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말나식(末那識)이 존재(存在)하는 한계는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이 남아 있을 때 까지만이 되어 아집(我執). 법집(法執)을 끊은 경지에선 없는 것이 되니 이 때엔 어떻게 되는가가 문제이다. 이것에 관해선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이 남아 있는 한해서는 말나식(末那識)은 염오(染汚)의 말나(末那)로 존재(存在)하고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끊은 경지에선 제8식(第八識)도 염오성(染汚性)이 아니므로 평등성지(平等性智)를 일으킨다고 한다.
4. 아뢰야식(阿賴耶識) : 아뢰야(阿賴耶)는 범어(梵語)의 음역(音譯)으로 현장(玄奘)은 이것을 쌓아둔다는 뜻으로 보아 함장(含藏)이라 번역(飜譯)했고 진제(眞諦)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보아 무몰(無没)이라 번역(飜譯)한 바 있다. 결국 아뢰야식(阿賴耶識)이란 말은 우리가 시시각각 행(行)하는 업(業)은 그것에 따른 종자(種子)를 남기니 이 종자는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저장되어 없어지지 않음이라 창고에 물건을 저장해 두는 것과 같다는 뜻에서 명명(命名)된 것이다. 우리가 매일같이 하는 신(身) 구(口) 의(意)의 모든 행동은 그 낱낱의 행동마다 세력적인 종자(種子)가 아뢰야식(阿賴耶識) 가운데 저장되었다가 뒷 날 어느 때인가 인연(因緣)을 만나 다시 모든 세계(世界)를 전개 시키게 되는 것이다. 물론 아뢰야식(阿賴耶識)도 인연(因緣)으로 생기는 것이라 생멸적(生滅的)인 것엔 틀림 없으나 무시이래(無始以來)로 부터 아득한 미래(未來)를 향하여 끊임없이 현현(顯現)하되 제7식(第七識)의 활동에 의하여 자체 안에 간직해 두었던 선악(善惡)을 전개 시키니 이렇게 전개되기 시작한 선악(善惡)의 종자(種子)는 다시 제6식(第六識)의 선악업(善惡業)의 훈습력(熏習力)에 의해 다시 전개되어 삼계(三界) 육도(六道) 등의 세계를 전개 시키는 것이다. (계속)
祝願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