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귀의
구경사
0
342
04.20 09:46
五. 삼귀의(三歸依)의 대상
삼귀의(三歸依)하면 불(佛) 법(法) 승(僧)의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한다는 말로서 이렇게 보면 나와 귀의(歸依)의 대상인 삼보(三寶)는 별개의 것으로 존재(存在)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본(本) 경(經)에선 그 삼귀의(三歸依)의 대상이 자기(自己) 자신(自身)임을 밝히고 있으니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여래성품(如來性品)엔 이것에 대하여 부처님의 인가(印可)를 받은 가섭존자(迦葉尊者)의 말을 통하여 이렇게 설(說)하고 있다. <어떤 중생(衆生)이 이러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을 믿는 이가 있으면 그 사람은 자연 삼귀의(三歸依)할 곳을 분명하게 알 것이니 왜냐하면 부처님의 비밀(祕密)한 법장(法藏)에는 불성(佛性)이 있으므로 이런 경전(經典)을 선량하여 말하는 이는 모두 몸 가운데 불성(佛性)이 있다고 말하니 이런 사람은 삼귀의(三歸依)할 곳을 먼 데서 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오는 세상에는 내 몸도 삼보(三寶)를 일룰 것이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성문 (聲聞) 연각(緣覺)과 다른 중생(衆生)들이 모두 저에게 귀의하여 공경(恭敬)하고 예배(禮拜)하여야 할 것이며 선남자(善男子)들이 이런 뜻으로 대승경전(大乘經典)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이 삼귀의(三歸依)에 대해선 다음과 같이 설(說)하고 있다. <만일 부처가 법보(法寶)와 승보(僧寶)와 다르다고 말하면 삼귀의(三歸依)할 곳이 되지 못한다.> 장수품(長壽品)에 <여래(如來)가 어떤 때에는(삼귀의 = 三歸依)를 하나를 말하여 셋이라 하고 또 셋을 말하여 하나라고 하나니 이것은 부처님의 경계요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의 알 바가 못된다.> 사상품(四相品) 이제 이것을 종합하여 본다면 믿는 자의 몸 가운데에는 불성(佛性)이 다 구족(具足)되어 있어 각자 자신의 귀의처(歸依處)가 되는 것이니 성문(聲聞)이건 연각(緣覺)이건 중생(衆生)이건 자성불(自性佛)께 귀의(歸依)하여 공경예배(恭敬禮拜)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귀의(歸依)의 대상은 불성(佛性)이 구족(具足)되어 있다는 것에 의해서의 자신(自身)이요 망상(妄想) 번뇌(煩惱)로 얼룩진 면에서의 자신(自身)은 아니라는 것이며 이 귀의처(歸依處)인 삼보(三寶)를 자신(自身)과 별개의 것으로도 자신으로도 펼치고 합하는 것은 결국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의 경계에서 만 이것을 설(說)할 수 있다는 것이 된다. 실로 삼귀의(三歸依)라면 자신(自身)을 삼보(三寶)로 하는 것이 불성(佛性)을 구족(具足)하고 성불(成佛)을 하려는 불자(佛子)로선 마땅한 도리(道理)겠으나 그 뜻이 깊어 쉽게 행할 수 없음에 자신(自身)의 근기(根機)를 따라 쉬운 것부터 해 나아 가야 일승(一乘)의 도리(道理)에 계합(契合)함이 현실상으론 오히려 맞을지도 모르겠다. ※다음은 승만경(勝䰋經)의 대의를 간략히 설명 하도록 하겠습니다.
삼귀의(三歸依)하면 불(佛) 법(法) 승(僧)의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한다는 말로서 이렇게 보면 나와 귀의(歸依)의 대상인 삼보(三寶)는 별개의 것으로 존재(存在)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본(本) 경(經)에선 그 삼귀의(三歸依)의 대상이 자기(自己) 자신(自身)임을 밝히고 있으니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여래성품(如來性品)엔 이것에 대하여 부처님의 인가(印可)를 받은 가섭존자(迦葉尊者)의 말을 통하여 이렇게 설(說)하고 있다. <어떤 중생(衆生)이 이러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을 믿는 이가 있으면 그 사람은 자연 삼귀의(三歸依)할 곳을 분명하게 알 것이니 왜냐하면 부처님의 비밀(祕密)한 법장(法藏)에는 불성(佛性)이 있으므로 이런 경전(經典)을 선량하여 말하는 이는 모두 몸 가운데 불성(佛性)이 있다고 말하니 이런 사람은 삼귀의(三歸依)할 곳을 먼 데서 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오는 세상에는 내 몸도 삼보(三寶)를 일룰 것이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성문 (聲聞) 연각(緣覺)과 다른 중생(衆生)들이 모두 저에게 귀의하여 공경(恭敬)하고 예배(禮拜)하여야 할 것이며 선남자(善男子)들이 이런 뜻으로 대승경전(大乘經典)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이 삼귀의(三歸依)에 대해선 다음과 같이 설(說)하고 있다. <만일 부처가 법보(法寶)와 승보(僧寶)와 다르다고 말하면 삼귀의(三歸依)할 곳이 되지 못한다.> 장수품(長壽品)에 <여래(如來)가 어떤 때에는(삼귀의 = 三歸依)를 하나를 말하여 셋이라 하고 또 셋을 말하여 하나라고 하나니 이것은 부처님의 경계요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의 알 바가 못된다.> 사상품(四相品) 이제 이것을 종합하여 본다면 믿는 자의 몸 가운데에는 불성(佛性)이 다 구족(具足)되어 있어 각자 자신의 귀의처(歸依處)가 되는 것이니 성문(聲聞)이건 연각(緣覺)이건 중생(衆生)이건 자성불(自性佛)께 귀의(歸依)하여 공경예배(恭敬禮拜)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귀의(歸依)의 대상은 불성(佛性)이 구족(具足)되어 있다는 것에 의해서의 자신(自身)이요 망상(妄想) 번뇌(煩惱)로 얼룩진 면에서의 자신(自身)은 아니라는 것이며 이 귀의처(歸依處)인 삼보(三寶)를 자신(自身)과 별개의 것으로도 자신으로도 펼치고 합하는 것은 결국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의 경계에서 만 이것을 설(說)할 수 있다는 것이 된다. 실로 삼귀의(三歸依)라면 자신(自身)을 삼보(三寶)로 하는 것이 불성(佛性)을 구족(具足)하고 성불(成佛)을 하려는 불자(佛子)로선 마땅한 도리(道理)겠으나 그 뜻이 깊어 쉽게 행할 수 없음에 자신(自身)의 근기(根機)를 따라 쉬운 것부터 해 나아 가야 일승(一乘)의 도리(道理)에 계합(契合)함이 현실상으론 오히려 맞을지도 모르겠다. ※다음은 승만경(勝䰋經)의 대의를 간략히 설명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