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귀의(三歸依)
구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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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9 17:10
삼귀의(三歸依)
우리가 강을 건넘에 배를 필요로 하고 높은 곳을 오름에 사다리를 필요로 하듯이 나고 죽는(생사=生死) 고통의 바다를 건너 열반(涅槃)의 저 언덕에 이르고자 함에는 돌아가 의지할 곳(귀의처=歸依處)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 불자(佛子)들 에게는 세가지의 보배라 하여 불(佛). 법(法). 승(僧)의 삼보(三寶)를 일컽는다. 그리하여 이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하는 불제자(佛弟子)가 되는 필요 불가결의 조건이며 불제자로서의 첫 순간의 맹세요 선언으로 가장 중히 여겨지는 것이다. 그리고 불가(佛家)에선 이것을 통상적으로 삼귀의(三歸依)라 하여
귀의불 양족존(歸依佛 兩足尊)
귀의법 이욕존(歸依法 離欲尊)
귀의승 중중존(歸依僧 衆中尊)
이란 귀절로 봉송(奉誦)되어 왔다. 이제 우리는 이것을 하나 하나 풀어감으로써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에 대한 이해를 명확히 하고 그에 따라 우리 자신과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귀의불 양족존(歸依佛 兩足尊)이란? 직역하면 두가지를 다 갖추신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두가지란 곧 복덕(福德)과 지혜(智慧)이다. 부처님께선 온갖 중생의 복전(福田)이 되려는 무량겁(無量劫)의 수행(修行)으로 비할바 없는 지혜(智慧)를 구족하시었고 최고지상(最高至上)의 도(道)를 구하려는 무량겁(無量劫)에 걸친 원(願)과 수행(修行)으로 비할바 없는 지혜(智慧)를 구족하시었다고한다. 그리고는 대자비심(大慈悲心)을 일으켜 중생(衆生)을 제도하신다고 한다. 그러기에 이것은 부처님이 갖추신바요 중생으로서는 갖추어야할 바인 것이다. 복덕(福德)이 없다면 어찌 그 많은 중생의 복밭(복전=福田)이 돠겠으며 지혜(智慧)가 없다면 어찌 생사(生死)의 이치를 알아 고해(苦海)를 벗어날 수 있겠으며 자비(慈悲)가 없다면 어찌 중생들을 열반(涅槃)의 저 언덕으로 인도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볼 때 부 처님은 복덕(福德)의 구족(具足)으로 중생의 복밭이 되며 지혜(智慧)의 구족(具足)으로 고해(苦海)를 떠나 열반(涅槃)에드시며 그러나 중생을 불쌍히 여기심에 자비의 마음을 일으켜 다시 고해로 오시어 중생이 다하는 날까지 중생을 건지려 끝없이 활동하시는 분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이에 귀의한다고 함은 불자의 궁극의 목적이 성불(成佛)에 있는 이상 단순한 귀의가 아니라 이러하신 부처님께 일심(一心)으로 돌아가 언젠가는 자신도 이렇개 되겠다는 굳은 신심(信心)의 약속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 귀의볍 이욕존(歸依法 離欲尊)이란?
모든 탐욕(貪欲)을 여읜 거룩한 법(法)에 귀의(歸依)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법을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단순한 뜻으로만 받아들이기 쉽다. 물론 원시 불교 시대의 일부에선 그렇게 여긴 것도 사실이며 또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다 우주(宇宙)의 진리(眞理)와 그에 이르는 길을 말로서 표현한 것에 불과함을 알 때 우리가 법을 일개(一個) 경전상(經典上)의 교설(敎說)로만 받아들인다면 편협함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법이란 작은 의미에서는 부처님의 교설이라고 하겠지만 좀 더 깊은 뜻으로 말할 때는 모든 사물의 근원인 진리(眞理) 당체(當體)를 말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우리 범부들은 갖가지 탐욕에 얽매여 진리를 제멋대로 쪼개어 바보로만들기도 하고 자기와는 관계없는 것인 양 객관화시켜 죽은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진리란 언제나 나를 떠나지 않고 언제나 참되고 언제나 변함없이 싱싱하게 생동하되 원흉무애(圓融無礙)한 것이기에 쪼개질 수도 버려질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쪼개고 버릴 때에는 스스로 일르킨 탐욕의 구름으로 그만큼 진리의 광명을 덮어 암흑의 고해에서 허덕이게 된다는 것 뿐이다. 따라서 이 탐욕을 여읜 법(法)에 의지한다는 것은 바로 탐욕의 구름으로 뒤덮혀 빛을 잃은 고해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그 구름을 해쳐버림으로써 진리의 광명, 진리의 생명을 찾아 그 광명 그 생명과 하나가 되어 끝없는 열반(涅槃)에 자재(自在)하리라는 굳은 신심(信心)의 약속인 것이다.
끝으로 귀의승 중중존(歸依僧 衆中尊)이라? 말은 무리 가운데 거룩한 승가(僧伽)에 귀의(歸依)한다는 뜻이다. 흔히 승(僧)이라 하면 머리를 깍고 출가한 소위 스님이란 특수한 신분 의 사람만을 지칭하는 뜻 여겨지기도 하지만 원래의 뜻은 화합중(和合衆)으로서 즉 부처님의 뜻을 따라 수행(修行)하는 재가 남여(在家 男女)와 출가 남여(出家 男女)의 대중(大衆)을 다 가르키는 말이다. 인간(人間)인 한 자칫 잘못하면 진리를 등지고 독선적으로 살 우려가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불(成佛)을 목적으로 할진대 스스로 그것을 떠나 부처님의 법을 따라 수행하는 보다 이성적(理性的)이요 보다 청정(淸淨)하고 보다 평화(平和)로운 착한 벗들 사이에 끼어 그들과 더불어 마음을 밝히고 그들과 더불어 행(行)을 닦아가야 할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추인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우리 스스로가 승가의 일원(一員)이 되고 승가의 일원(一員)임을 자각하여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하되 나아가서는 모든 중생(衆生)과 더불어 한 몸의 승가가 되겠다는 굳은 신심(信心)의 약속으로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삼귀의(三歸依)의 하나 하나를 풀어보았다. 그렇다면 이들과 우리와의 관계는 어떤가, 물론 위에서 다 말해진 것이지만 이것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간단히 그 정의를 내린다며
1. 불(佛)에 귀의(歸依)함은 복혜(福慧)와 자비(慈悲)의 고향(故鄕)으로 돌아가 의지함이니 모든 중생과 더불어 내 스스로 그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약속이다.
2. 법(法)에 귀의(歸依)함은 광명(光明)과 생명(生命)의 고향(故鄕)으로 돌아가 의지함이니 모든 중생과 더불어 내 스스로 그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약속이며.
3. 승(僧)에 귀의(歸依)함은 청정(請淨)과 평화(平和)의 고향(故鄕)으로 돌아가 의지 함이니 모든 중생(衆生)과 더불어 내 스스로 그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약속이라 하겠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어느 면에서든지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는 별개의 것이 아니요 나 또한 그와 딴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우리는 현재 어디까지나 중생이다. 그러므로 온갖 잡다한 인연 속에서 의지할 곳도 없이 자신마져도 불신(不信)하면서 방황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몸과 마음을 영원히 편히 할 의지처가 생겼다. 이제 다시 우리는 확고한 신앙심을 가지고 아주 경건하게 삼보전에 두손을 모으자. 암흑(暗黑)의 구름은 걷히고 광명(光明)은 빛나 온 우주(宇宙)는 점점 더 아름답게 장엄(莊嚴)될 것이다.
※불가(佛家)에선 삼보(三寶)를 설명함에 있어 세가지로 설명하기도 하니 이것을 삼종삼보(三種三寶)라고 하니
1. 동체삼보(同體三寶) 본체론적(本體論的)으로 설명하여 진여법신(眞如法身)에 갖추어져 있는 완전무결(完全無缺)한 영각(靈覺)을 불보(佛寶). 그의 고요한 법성(法性)을 법보(法寶). 성품(性品)이 어김이 없는 덕상(德相)을 승보(僧寶)라 하며
2. 별상삼보(別相三寶) 종교적으로 설명한 것이니 석가모니를 위시한 시방삼세(十方三世)의 모든 부처님은 불보(佛寶). 여러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온갖 교법(敎法)은 법보(法寶). 이것에 따라 수행(修行)하는 이들을 승보(僧寶)하며.
3. 주지삼보(住持三寶) 법당에 모셔진 불상(佛像)을 불보(佛寶). 경(經). 율(律). 논(論)의 삼장(三藏)을 법보(法寶). 이에 따라 수행(修行)하는 스님들을 승보(僧寶)라 한다.
우리가 강을 건넘에 배를 필요로 하고 높은 곳을 오름에 사다리를 필요로 하듯이 나고 죽는(생사=生死) 고통의 바다를 건너 열반(涅槃)의 저 언덕에 이르고자 함에는 돌아가 의지할 곳(귀의처=歸依處)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 불자(佛子)들 에게는 세가지의 보배라 하여 불(佛). 법(法). 승(僧)의 삼보(三寶)를 일컽는다. 그리하여 이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하는 불제자(佛弟子)가 되는 필요 불가결의 조건이며 불제자로서의 첫 순간의 맹세요 선언으로 가장 중히 여겨지는 것이다. 그리고 불가(佛家)에선 이것을 통상적으로 삼귀의(三歸依)라 하여
귀의불 양족존(歸依佛 兩足尊)
귀의법 이욕존(歸依法 離欲尊)
귀의승 중중존(歸依僧 衆中尊)
이란 귀절로 봉송(奉誦)되어 왔다. 이제 우리는 이것을 하나 하나 풀어감으로써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에 대한 이해를 명확히 하고 그에 따라 우리 자신과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귀의불 양족존(歸依佛 兩足尊)이란? 직역하면 두가지를 다 갖추신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두가지란 곧 복덕(福德)과 지혜(智慧)이다. 부처님께선 온갖 중생의 복전(福田)이 되려는 무량겁(無量劫)의 수행(修行)으로 비할바 없는 지혜(智慧)를 구족하시었고 최고지상(最高至上)의 도(道)를 구하려는 무량겁(無量劫)에 걸친 원(願)과 수행(修行)으로 비할바 없는 지혜(智慧)를 구족하시었다고한다. 그리고는 대자비심(大慈悲心)을 일으켜 중생(衆生)을 제도하신다고 한다. 그러기에 이것은 부처님이 갖추신바요 중생으로서는 갖추어야할 바인 것이다. 복덕(福德)이 없다면 어찌 그 많은 중생의 복밭(복전=福田)이 돠겠으며 지혜(智慧)가 없다면 어찌 생사(生死)의 이치를 알아 고해(苦海)를 벗어날 수 있겠으며 자비(慈悲)가 없다면 어찌 중생들을 열반(涅槃)의 저 언덕으로 인도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볼 때 부 처님은 복덕(福德)의 구족(具足)으로 중생의 복밭이 되며 지혜(智慧)의 구족(具足)으로 고해(苦海)를 떠나 열반(涅槃)에드시며 그러나 중생을 불쌍히 여기심에 자비의 마음을 일으켜 다시 고해로 오시어 중생이 다하는 날까지 중생을 건지려 끝없이 활동하시는 분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이에 귀의한다고 함은 불자의 궁극의 목적이 성불(成佛)에 있는 이상 단순한 귀의가 아니라 이러하신 부처님께 일심(一心)으로 돌아가 언젠가는 자신도 이렇개 되겠다는 굳은 신심(信心)의 약속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 귀의볍 이욕존(歸依法 離欲尊)이란?
모든 탐욕(貪欲)을 여읜 거룩한 법(法)에 귀의(歸依)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법을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단순한 뜻으로만 받아들이기 쉽다. 물론 원시 불교 시대의 일부에선 그렇게 여긴 것도 사실이며 또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다 우주(宇宙)의 진리(眞理)와 그에 이르는 길을 말로서 표현한 것에 불과함을 알 때 우리가 법을 일개(一個) 경전상(經典上)의 교설(敎說)로만 받아들인다면 편협함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법이란 작은 의미에서는 부처님의 교설이라고 하겠지만 좀 더 깊은 뜻으로 말할 때는 모든 사물의 근원인 진리(眞理) 당체(當體)를 말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우리 범부들은 갖가지 탐욕에 얽매여 진리를 제멋대로 쪼개어 바보로만들기도 하고 자기와는 관계없는 것인 양 객관화시켜 죽은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진리란 언제나 나를 떠나지 않고 언제나 참되고 언제나 변함없이 싱싱하게 생동하되 원흉무애(圓融無礙)한 것이기에 쪼개질 수도 버려질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쪼개고 버릴 때에는 스스로 일르킨 탐욕의 구름으로 그만큼 진리의 광명을 덮어 암흑의 고해에서 허덕이게 된다는 것 뿐이다. 따라서 이 탐욕을 여읜 법(法)에 의지한다는 것은 바로 탐욕의 구름으로 뒤덮혀 빛을 잃은 고해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그 구름을 해쳐버림으로써 진리의 광명, 진리의 생명을 찾아 그 광명 그 생명과 하나가 되어 끝없는 열반(涅槃)에 자재(自在)하리라는 굳은 신심(信心)의 약속인 것이다.
끝으로 귀의승 중중존(歸依僧 衆中尊)이라? 말은 무리 가운데 거룩한 승가(僧伽)에 귀의(歸依)한다는 뜻이다. 흔히 승(僧)이라 하면 머리를 깍고 출가한 소위 스님이란 특수한 신분 의 사람만을 지칭하는 뜻 여겨지기도 하지만 원래의 뜻은 화합중(和合衆)으로서 즉 부처님의 뜻을 따라 수행(修行)하는 재가 남여(在家 男女)와 출가 남여(出家 男女)의 대중(大衆)을 다 가르키는 말이다. 인간(人間)인 한 자칫 잘못하면 진리를 등지고 독선적으로 살 우려가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불(成佛)을 목적으로 할진대 스스로 그것을 떠나 부처님의 법을 따라 수행하는 보다 이성적(理性的)이요 보다 청정(淸淨)하고 보다 평화(平和)로운 착한 벗들 사이에 끼어 그들과 더불어 마음을 밝히고 그들과 더불어 행(行)을 닦아가야 할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추인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우리 스스로가 승가의 일원(一員)이 되고 승가의 일원(一員)임을 자각하여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하되 나아가서는 모든 중생(衆生)과 더불어 한 몸의 승가가 되겠다는 굳은 신심(信心)의 약속으로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삼귀의(三歸依)의 하나 하나를 풀어보았다. 그렇다면 이들과 우리와의 관계는 어떤가, 물론 위에서 다 말해진 것이지만 이것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간단히 그 정의를 내린다며
1. 불(佛)에 귀의(歸依)함은 복혜(福慧)와 자비(慈悲)의 고향(故鄕)으로 돌아가 의지함이니 모든 중생과 더불어 내 스스로 그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약속이다.
2. 법(法)에 귀의(歸依)함은 광명(光明)과 생명(生命)의 고향(故鄕)으로 돌아가 의지함이니 모든 중생과 더불어 내 스스로 그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약속이며.
3. 승(僧)에 귀의(歸依)함은 청정(請淨)과 평화(平和)의 고향(故鄕)으로 돌아가 의지 함이니 모든 중생(衆生)과 더불어 내 스스로 그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약속이라 하겠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어느 면에서든지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는 별개의 것이 아니요 나 또한 그와 딴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우리는 현재 어디까지나 중생이다. 그러므로 온갖 잡다한 인연 속에서 의지할 곳도 없이 자신마져도 불신(不信)하면서 방황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몸과 마음을 영원히 편히 할 의지처가 생겼다. 이제 다시 우리는 확고한 신앙심을 가지고 아주 경건하게 삼보전에 두손을 모으자. 암흑(暗黑)의 구름은 걷히고 광명(光明)은 빛나 온 우주(宇宙)는 점점 더 아름답게 장엄(莊嚴)될 것이다.
※불가(佛家)에선 삼보(三寶)를 설명함에 있어 세가지로 설명하기도 하니 이것을 삼종삼보(三種三寶)라고 하니
1. 동체삼보(同體三寶) 본체론적(本體論的)으로 설명하여 진여법신(眞如法身)에 갖추어져 있는 완전무결(完全無缺)한 영각(靈覺)을 불보(佛寶). 그의 고요한 법성(法性)을 법보(法寶). 성품(性品)이 어김이 없는 덕상(德相)을 승보(僧寶)라 하며
2. 별상삼보(別相三寶) 종교적으로 설명한 것이니 석가모니를 위시한 시방삼세(十方三世)의 모든 부처님은 불보(佛寶). 여러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온갖 교법(敎法)은 법보(法寶). 이것에 따라 수행(修行)하는 이들을 승보(僧寶)하며.
3. 주지삼보(住持三寶) 법당에 모셔진 불상(佛像)을 불보(佛寶). 경(經). 율(律). 논(論)의 삼장(三藏)을 법보(法寶). 이에 따라 수행(修行)하는 스님들을 승보(僧寶)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