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일체개공(一切皆空) 이라고한
구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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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3 09:27
그러면 일체개공(一切皆空) 이라고한 까닭은 일체(一切)가 연기(緣起)이기 때문이라 하겠다. 곧 모든 존재(存在)는 인(因)과 연(緣)의 가화합(假和合)에 의하여 생긴 것이며 따라서 타(他)로부터 어떤 성질적(性質的) 영향규정(影響規定)을 받지않고 다만 그 스스로의 힘으로 영주(永住)하는 실재성(實在性 = 自性)을 가지는 것은 과거(過去)에도 현재(現在)에도 미래(未來)에도 없기때문에 일체(一切)의 존재(存在)는 그대로 공(空)이라고 체염(締念)해 버리는 것이다. 불교(佛敎)가 연기즉법(緣起即法)이라고 설(說)한 뜻이 여기에 있기 때문에 연기(緣起)의 진리(眞理)는 일체(一切)의 존재(存在)로부터 자성(自性)을 철저(徹底)이 부정(否定)하는 절대무(絶對無 = 空)의 원리(原理)이기때문에 이것을 채득(體得)하면 우리들의 독단적(獨斷的)인 실제론(實在論)의 편견(偏見)을 타파(打破)함과 동시(同時)에 모든 고뇌죄악(苦惱罪惡)의 근원(根源)이 되는 우리들의 일방적(一方的)인 집착(執着)에서 햬탈(解脫)을 얻게 될 것이다. 지금 이 공(空)의 원리(原理)를 이해(理解)하기 쉽게 설명(說明)하자면 일개(一個)의 책상(冊床)을 두고 볼 때 일쳬개공(一切皆空)이라 한다면 이 챽상(册床)도 이대로 공(空)이라고 해야 될 것인데 어찌하여 현재(現在) 일정(一定)한 형태(形態)를 가진 책상(冊床)이라고 하는 존재(存在)가 이대로 공(空)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은 목재(木材)의 인(因)이 인공(人工)과 여러가지 연(緣)에 의하여 가정(假定)으로 성립(成立)된 존재(存在)로서 영구불변(永久不變)의 책상자성(冊床自性)이 구비(具備)되어 있지 않기떄문이라고 생각이 된다. 그러므로 만약 이것이 다른 인연(因緣)을 만나게 되면 곧 현쟤(現在)와는 다른 모양(模樣)이 될 것이고 다른 용도(用途)로 변(變)하기 때문이다. 가사 새로 인공(人工)이라는 연(緣)을 더한다면 이 책상(冊床)은 식탁(食桌)으로도 되고 발판으로도 될 것이며 또 화연(火緣)을 가(加)하면 그 재료(材料)의 목재중(木材中)의 수분(水分)은 증발(蒸發)하여 자연현상(自然現象)의 구름이 되고 그 구름이 다시 공중(空中)의 공기(空氣)라는 연(緣)을 만나면 의결(疑結)된 물방울이 되어 지상(地上)에 내려 샘물 수도(水道)물이 되어 생물(生物)의 육체(肉體)에 흡입(吸入)되어 피와 살, 그 밖의 유기물(有機物)의 일부(一部)로도 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모든 사물(事物)에는 가(加)해지는 연(緣)에 따라 어떤 것으로도 변(變)하는 공성(空性)을 구유(具有)하고 있으나 지금은 어떤 종자(種子)의 인연(因緣)으로 일시적(一時的)인 화합(和合)에 의해 일시적(一時的)인 형상(形象)을 나타내고 일시적(一時的)인 용도(用途)에 사용(使用)되고 있을 뿐이다. 이와같이 일체만유(一切萬有)가 자주적(自主的)인 독일성(獨一性), 영구성적(永久性的)인 확주성(確住性), 고정적(固定的)인 실제성(實在性)을 갖지 못하는 공(空)이기 때문에 모든 연(緣)에 따라 유전변환(流轉變還)되고 각양각색(各樣各色)의 현상(現象)과 작용(作用)이 전개(展開)되고 있는 것이며 이와같은 경우(境遇)에 다다르게 되면 사물(事物)이 마음(심 =心)을 초월(超越)하여 존재(存在)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마음도 사물(事物)을 떠나서 존재(存在)할 수 없으며 물(物), 심(心)이 상대(相對)함에 따라 물(物)도 여기에서 물(物)이되며 심(心)도 여기에선 비로소 심(心)이 되며 그 밖에 세계(世界)및 인간(人間)도 또한 별개독립(別個獨立)의 존재(存在)가 아니고 상호관련규정相互關連規定)에 의하여 새계(世界)도 세계(世界)로서 성립(成立)되고 인간(人間)도 인간(人間)으로서 존재(存在)할 수 있다는 진리(眞理)가 자연(自然)이 납득(納得)되어 유물론(唯物論)은 말할 것도 없고 유심론(唯心論 = 觀念論)도 함께 독단편견(獨斷偏見)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의 인의주의 (認議主義 =식(識)이나 의식현상(意識現象 = 명(名) 물질현상(物質現象 = 색(色)도 상의상조(相依相助)하여 성립(成立)되는 것으로서 그 성립(成立)에는 시간상(時間相)의 전후(前後)가 없음을 교시(敎示)하여 "식(識)은 명색(名色)의 연(緣)으로 일어나며 명색(名色)은 식(識)의 연(緣)으로 일어난다.,,라고 설(說)하였으며 마치 세개의 솥밭과 같이 의지(依支)하고 의지당(依支當)하여 지상(地上)에 서 있는 것과 같다고 비유(比喩)하였으며 주관(主觀)과 객관(客觀)과는 동시동각(同時同刻)에 성립(成立)되다고 한 "칸트,, 이래(以來)의 인식론(認識論)의 정설"(定說)을 이미 이천오백년전(二千五百年前)의 옛날에 설(說)하신 것이다. 다만 불교(佛敎)는 일면(一面)으로 이러한 인식론상(認識論上)의 상대론(相對論)에 입각(立脚)하였다고 하면서 동시(同時)에 연기(緣起)의 이법(理法) 거기에 대(對)해서는 절대론(絶對論)을 주장(主張)하고 있다는 것을 보아 넘겨서는 않이된다.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연기법(緣起法)은 인연관계(因緣關係)에 의하여 끊임없이 변화(變化)하여 생멸(生滅)하는 일체(一切)의 존재(存在)를 내면적(內面的)으로 통일(統一)하는 절대적(絶對的)인 최고원리(最高原理)인 것입니다. 이 법(法)은 자기(自己)가 지은 것도 아니며 또 타인(他人)의 조작물(造作物)도 아닌 부처님이 이 세상(世上)에 출현(出現)했거나 안했거나 간에 시(時間)과 공간 (空間)을 초월(超越)하여 영주(永住)하는 진리(眞理)라고 하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따른다면 이것은 인간(人間)의 요구(要求)에 앞선 무시이래 자연(無始以來 自然)이 우리들에 주어져 있기때문에 우리들 인간(人間)의 사고(思考)나 사상(思想)을 초월(超越)한 자연(自然)의 신성(神聖)한 법(法)이며 항상(恒常) 불변(不變)의 절대법(絶對法)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처님의 기본사상(基本思想)에 기인(基因)하여 대승불교(大乘佛敎)를 처음으로 논리적(論理的)으로 체계화(體系化)한 용수보살(龍樹菩薩)은 그 기본적(基本的) 저술(著述 = 中論)을 비롯하여 타일체(他一切)의 상대적(相對的)인 경험적 존재(經驗的 存在) 모든 것이 생멸(生滅)하며 가고 온다는 것에 대(對)하여 연기법(緣起法) 그 자체(自體)는 불생불멸불래불거(不生不滅不來不去)라고 하는 절대항상(絶對恒常)의 최고원리(最高原理)이며 우리들을 번뇌(煩惱)속으로 오염(汚染)케 하는 대립적(對立的), 분별적(分別的) 논의(論議)로부터 해방(解放)시키는 안과태평(安過泰平)의 제일의적(第一義的)인 진리(眞理)라고 주장(主張)하였다. 이와같이 불교(佛敎)의 근본원리(根本原理)로 하는 연기법(緣起法)은 모든 대립(對立)을 초월(超越)한 절댸법(絶對法)이기는 하나 일체(一切)의 대립(對立)은 이것에 의하여 성립(成立)되고 또 이것에 의하여 존재(存在)하기 때문에 이것은 분명(分明)히 대립적(對立的) 통일원리(統一原理)인 동시(同時)에 모든 대립적(對立的) 존재(存在)에도 각각(各各) 다른 일체(一切)의 것을 통섭統攝)하는 통일원리(統一原理)가 인식(認識)될 것이다. 중국당대(中國 唐代)에 현수대사(賢首大師)에 의하면 조직(組織)된 화엄학(華嚴學)에 있어 일(一)과 다(多)와의 상용현상(相容現象)과 실재(實在)와의 융통(融通), 그밖의 모든 존재존재(存在)의 존즉상입(存即相入)을 설(說)한 이 무진연기론(無盡緣起論)이 체계화(體系化)된 것도 번뇌(煩惱) 이 연기(緣起)의 절댸법(絶對法)을 철저화(徹底化)시켜 교묘(巧妙)하게 표현(表現)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런 무한(無限)의 상대관계(相對關係) 내면적(內面的)으로 통일(統一) 하는 힘인 연기법(緣起法)은 결(決)코 순수((純粹) 객관성(客觀性)의 존재(存在)는 될 수 없는 것이다. 그 본질(本質)은 이른바 "자기(自己)에 대(對)해 있는것.,, 으로서 무릇 정신적(精神的)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승경전(大乘經典)에서는 삼계(三界)의 근본원리(根本原理)를 일심(一心)이라 이름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일심(一心)이라 함은 일체(一切)를 통섭(統攝)하는 절대무이(絶對無二)의 심(心)이라는 뜻으로 이것은 최고절대(最高絶對)의 원리(原理)인 연기법(緣起法)을 다소자각적(多少自覺的)으로 표현(表現)한 것이라하곘다. 그리하여 이 연기법(緣起法)울 증득(證得)함으로써 각자(覺者)가 된 부처님은 "나를 보는 자(者)는 법(法)을 보는 것이며 법(法)을 보는 자(者)는 나를 보는 것,,이라고 재삼(再三) 말씀하셨기 때문에 연기법(緣起法)은 우리 인간(人間)의 정신(精神)을 통(通)하여 그 인격(人格)위에 스스로의 가치내용(價値內容)을 실재(實在)에 나타내는 본성(本性)을 구비(具備)한 자연적(自然的) 가치법(價値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이 인격상(人格上)에 나타나는 가치내용(價値內容)이라 함은 어떤 것이 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