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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佛)과 보살(菩薩)

구경사 0 597
2.불(佛)과 보살(菩薩)
(華嚴經)에서는 다른 경전(經典)에서와는 달리 불(佛)은 정중(定中)에 들어있는 불(佛)이요 거의 설(說)함이 없으시고 실제 설법(說法)을 한 주 인물은 문수(文殊)와 보현(普賢)의 두 보살(菩薩)이고 다른 여러 보살(菩薩)들이 그 보조적인 역활을 하고 있으니 화엄경(華嚴經)의 사상적(思想的)인 면에서 부처님과 이 두 보살(菩薩)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문수보살(文殊菩薩)은 대지혜(大智慧)의 보살(菩薩)이니 대지혜(大智慧)란 곧 우주(宇宙) 인생(人生)의 진리(眞理)를 그대로 아는 다시 말하면 진여(眞如)와 하나가 된 지혜(智慧)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부처님의 지혜(智慧)이다. 그런데 우리 중생(衆生)들은 우리에겐 그런 지혜(智慧)가 아예 없는 줄 알고 부처님께만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수가 많다. 하지만 본(本) 경(經)에는  <이 모든 중생(衆生)이 여래(如來)의 지혜(智慧)를 다 가지고 있건만 어찌 무지하고 미혹하여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고 내가 마땅히 성도(聖道)로써 가르쳐 그로 하여금 망상집착을 멀리 여의고 자신(自身) 중에서 여래(如來)의 광대(廣大)한 지혜(智慧)를 보게 하여 부처님과 다름 없게 하리라.> (여래출현품 = 如來出現品)한 것처럼 그 여래지헤(如來智慧)는 우리 중생(衆生)에도 똑 같이 있으나 중생(衆生)에겐 그것이 번뇌망상(煩惱妄想)으로 덮혀져 있는 것이요 부처님에겐 그것이 완전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문수보살(文殊菩薩)은 바로 이러한 여래지혜(如來智慧) 즉 근본지(根本智)의 보살(菩薩)이다. 그러므로 중생(衆生)은 이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의해 자신에게도 이런 지혜(智慧)가 있음을 알고 믿고 수행(修行)을 거쳐서 문수(文殊)의 지혜(智慧)에 합일(合一)되는 것이니 문수(文殊)의 지혜(智慧)에 합일(合一)된 그 때엔 바로 여래(如來)의 지혜(智慧)와 같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수보살(文殊菩薩)에 의해 그 여래(如來)의 지혜(智慧)가 나를 떠나 있지 않음을 알고 또 믿게 된다 하여 바로 그 지혜(智慧)를 증득(證得)하고 그 지혜(智慧)와 더블어 일체의 잡된 것이 없이 하나가 된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여기엔 상당한 수행(修行)을 거쳐야만 되고 그러므로 중생(衆生)에겐 그것을 위한 수행(修行)이 요구되는 것이다. 보현보살(普賢菩薩)은 차별지(差別智)로써 바로 이 수행(修行)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보현보살(普賢菩薩)은 대행(大行)의 보살(菩薩)이니 생사고해(生死苦海)를 떠나게 하는 행(行)만큼 큰 행(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중생(衆生)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의 대지(大智)와 보현보살(普賢菩薩)의 대행(大行)을 성취(成就)하여 지(智)와 행(行)이 구족될 때 비로소 성불(成佛)을 하게 되는 것이다. 상기 론(上記 論)에 <일체의 모든 부처님이 이두 성자(聖者 문수(文殊)와 보현(普賢)을 의지하여 스승으로 삼아서 능히 대선근(大善根)의 극과(極果)를 성취(成就)하신다.>고 하신 것이 그것이다. 이렇게 볼 때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여래(如來)의 지혜(智慧)로 성불(成佛)의 인(因)을 삼아서 중생(衆生)을 발심(發心)시킴은 보현보살(普賢菩薩)의 행(行)이 있기 때문이요 또 보현보살(普賢菩薩)이 대행(大行)으로 중생(衆生)을 이롭게 하여 성불(成佛)을 향해 수행(修行)하여 가게 함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지혜(智慧)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 쪽이 빠질 수 없는 것이며 이 둘이 원만(圓滿)히 성취(成就)된 것이 곧 불(佛)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불(佛)이 된 후엔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불(佛)이란 곧 대보리(大菩提)의 극과(極果 = 문수(文殊)의 지혜(智慧)를 얻은 후 일체 중생(衆生)을 제도하는데에서 그 참다운 가치가 구현되는 것이니 중생(衆生)을 이롭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에서 보현보살(普賢菩薩)의 대행(大行)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지혜(智慧)를 바탕으로 중생세간(衆生世間)을 넡ㅡ낱낱이 아는 차별지(差別智)를 가지고 다시 발휘되는 것이며 보현보살(普賢菩薩)의 대행(大行)을 행한다고 함은 곧 중생(衆生)을 성불(成佛)토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으니 여기에서 다시 문수보살(文殊菩薩)의 대지(大智)는 중생(衆生)에게 성불(成佛)의 인(因)을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수(文殊)의 대지(大智)는 중생(衆生)이나 부처에게나 다 같이 있는 근본지(根本智)이므로 인(因)과 과(果)가 같고 보현보살(普賢菩薩)의 대행(大行)은 성불(成佛)전에는 스스로 닦고 남에게도 권하여 닦게 할 것이고 성불(成佛) 후에는 오로지 남을 이롭게 함이라 이것은 차별지(差別智)의 작용(作用)이라 이것으로 삼보(三寶)가 꾾어지지 않게 함이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볼 때 불(佛)과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삼자(三者)는 서로 불가분(不可分)의 관계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되니 그 것은 즉 지혜(智慧)만 있고 행(行)이 없다면 이승(二乘)과 겉아 열반(涅槃)에만 머물을 것이요. 행(行)만 있고 지혜(智慧)가 없다면 그것은 유루행(有漏行)이 될 것이며 또 만약에 이것에 지혜(智慧)와 행(行)이 있어도 부처님이 없으시다면 이것은 깨달아 원만히 성취(成就)한 자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부처가 되고자 할진대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지혜(智慧)로 믿음을 일으켜 보현보살(普賢菩薩)의 행(行)으로 수행(修行)하여 무상(無上)의 보리(菩提)를 증득(證得)하되 이에서 성불(成佛)하면 다시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지혜(智慧)로 근본(根本)을 삼아 중생(衆生)들을 발심(發心)시키고 보현보살(普賢菩薩)을 행(行)을 닦게 하여 그 모두를 성불(成佛)토록 하여야 할 것이다. 실로 우리는 지혜(智慧)를 계발(啓發)하여야 열반(涅槃)이 있음을 알고 행(行)이 있어야 실제 고해(苦海)를 건널 수 있으며 또 남도 권하여 건너게 할 수 있을 것이니 무수보살(文殊菩薩)을 지혜(智慧)의 스승으로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보살행(菩薩行)의 스승으로 삼아 성불(成佛)의 그 날까지 계속 정진(精進)하여야 할 것이며 성불(成佛) 후에도 또한 문수보살(文殊菩薩)의 대지(大智)와 보현보살(普賢菩薩)의 대행(大行)으로 중생(衆生)을 제도토록 큰 원願)을 세워야 할 것이다. 불(佛). 보살(菩薩)이 이름은 다르지만 어찌 딴 몸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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