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토설(佛國土說)
구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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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8 08:46
7. 불국토설(佛國土說)
개인적(個人的)으로 보아서 성불(成佛)한다는 것은 곧 이 세간(世間)을 청정(淸淨)한 불국토(佛國土)로 만든다는 것과도 같은 의미가 된다. 소승(小乘)에선 아라한(阿羅漢)을 극과(極果)로 하기 때문에 삼계(三界)를 뛰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대승(大乘)에선 불(佛)을 극과(極果)로 하기 때문에 삼계(三界)를 벗어나는 소극적(小極的)인 것보다는 삼계(三界)에 뛰어들어 그 곳에 있는 모든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하여 그 곳 자체를 불국토(佛國土)로 만드는데 그 목표가 있다. 반야경(般若經)의 불국토설(佛國土說)도 바로 이런 뜻에서 설(說)해지고 있으며 이것을 성취중생(成就衆生) 엄정불토(嚴淨佛土)라고 한다. 여기서 성취중생(成就衆生)이란 곧 각 개개인의 완성(完成)을 의미하는 것이요 엄정불토(嚴淨佛土)라는 것은 곧 불국토(佛國土)를 건설하는 것이니 이것은 다름 아닌 바라밀행(波羅蜜行)을 닦아가는 보살(菩薩)로서의 이대원(二大願)인 동시에 대승(大乘)을 배우는 우리들의 목표이기도 한 것이다. 번야경(般若經)에는 여러 곳에 이것을 강조하고 있으니 이제 대반야경(大般若經) 권 392에 엄정불토품(嚴淨佛土品)에 의하여 어떻게 불토(佛土)를 엄정(嚴淨)하는가 알아보자. <만일 보살(菩薩)이 초발심(初發心)으로 부터 구경(究竟)에 이르기까지 항상 스스로 자기 몸의 무거운 티끌과 말의 티끌과 생각의 티끌을 모두 깨끗이 하면 구하는 세가지 불토(佛土)를 엄정(嚴淨)히 하면 구하는 불토(佛土)가 엄정(嚴淨)히 될 것이다. 보살(菩薩)이 이와 같이 무거운 티끌 번뇌(煩惱)를 멀리 여의고 스스로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를 행(行)하고 또한 다른 이도 가르켜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을 행하게 하되 만일 모든 유정(有情)이 밥을 구하거던 밥을 주고 옷을 구하거던 옷을 주고.... 모든 것을 구하는대로 가지 가지의 자구(資具)를 때와 장소를 따라 모두 베풀어 주되 자기가 행(行)하는 것과 같이 타인(他人)이게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고 이와 같이 베풀어 베푼 선근(善根)을 가지고 모든 유정(有情)에게 평등히 회향(廻向)하면 구하는 불토(佛土)를 빨리 엄정(嚴淨)히 하여 유정(有情)을 원만히 이락(利樂)케 하느니라. 선현아 이 보살(菩薩)이 스스로 정계(淨戒) 바라밀다(波羅蜜多)를 행하여 또 타인(他人)에게 가르쳐 행하게 하며 안인바라밀다(安忍波羅蜜多)를 . . . . (내지).반야(般若 = 지혜(智慧) 바라밀다(波羅蜜多)를 . . . . . 구하는 불토(佛土)를 엄정(嚴淨)히 하고 원만히 유정(有情)을 이락(利樂)케 하느니라. 물론 여기서 말하는 무거운 티끌이란 신업(身業)으로서의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婬), 구업(口業)으로서의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舌), 악구(惡口)요 의업(意業)으로는 탐(貪), 진(嗔) 치(癡)의 십불선(十不善)이다. 따라서 불국토(佛國土)의 건설은 십불선(十不善)을 여의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음으로 스스로의 성취중생(成就衆生)과 더불어 같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버라밀(波羅蜜)이 우리가 닦아야 할 도(道)라 하면 불국토(佛國土)는 보살(菩薩)이 이 땅에 건설하여야 할 이상국토(理想國土)이다. 그리고 이런 것을 할 사람은 바로 우리 각자이다. 어찌 스스로 사명감(使命感)을 느끼지 않으리요. 그런데 이런 불국토(佛國土)는 구체적인 설명은 없어도 타방(他方)에도 있다고 설해져 있으니 예를 들면 소품반야(小品般若) 권 4에 <이와 같이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이 마음에 대승(大乘)을 즐겨 타방(他方)의 현재불(現在佛)앞에 설법(說法) 하시는 곳에 태어나고자 원하면 그 곳에서도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설함을 널리 들어 그 불토(佛土)에서도 역시 법(法)으로써 무량백천만(無量百千萬) 중생(衆生)에게 보이고 그들을 가르치고 이롭게 하며 기쁘게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머물게 하느니라.>고 한 것 등이 그것이니라. 이 타방불토(他方佛土) 사상(思想)은 소승(小乘)엔 없었던 것으로 대승(大乘) 특유의 사상(思想)이며 보살(菩薩)은 원(願)으로 인해 그 곳에 태어남을 알려 주고 있다.
개인적(個人的)으로 보아서 성불(成佛)한다는 것은 곧 이 세간(世間)을 청정(淸淨)한 불국토(佛國土)로 만든다는 것과도 같은 의미가 된다. 소승(小乘)에선 아라한(阿羅漢)을 극과(極果)로 하기 때문에 삼계(三界)를 뛰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대승(大乘)에선 불(佛)을 극과(極果)로 하기 때문에 삼계(三界)를 벗어나는 소극적(小極的)인 것보다는 삼계(三界)에 뛰어들어 그 곳에 있는 모든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하여 그 곳 자체를 불국토(佛國土)로 만드는데 그 목표가 있다. 반야경(般若經)의 불국토설(佛國土說)도 바로 이런 뜻에서 설(說)해지고 있으며 이것을 성취중생(成就衆生) 엄정불토(嚴淨佛土)라고 한다. 여기서 성취중생(成就衆生)이란 곧 각 개개인의 완성(完成)을 의미하는 것이요 엄정불토(嚴淨佛土)라는 것은 곧 불국토(佛國土)를 건설하는 것이니 이것은 다름 아닌 바라밀행(波羅蜜行)을 닦아가는 보살(菩薩)로서의 이대원(二大願)인 동시에 대승(大乘)을 배우는 우리들의 목표이기도 한 것이다. 번야경(般若經)에는 여러 곳에 이것을 강조하고 있으니 이제 대반야경(大般若經) 권 392에 엄정불토품(嚴淨佛土品)에 의하여 어떻게 불토(佛土)를 엄정(嚴淨)하는가 알아보자. <만일 보살(菩薩)이 초발심(初發心)으로 부터 구경(究竟)에 이르기까지 항상 스스로 자기 몸의 무거운 티끌과 말의 티끌과 생각의 티끌을 모두 깨끗이 하면 구하는 세가지 불토(佛土)를 엄정(嚴淨)히 하면 구하는 불토(佛土)가 엄정(嚴淨)히 될 것이다. 보살(菩薩)이 이와 같이 무거운 티끌 번뇌(煩惱)를 멀리 여의고 스스로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를 행(行)하고 또한 다른 이도 가르켜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을 행하게 하되 만일 모든 유정(有情)이 밥을 구하거던 밥을 주고 옷을 구하거던 옷을 주고.... 모든 것을 구하는대로 가지 가지의 자구(資具)를 때와 장소를 따라 모두 베풀어 주되 자기가 행(行)하는 것과 같이 타인(他人)이게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고 이와 같이 베풀어 베푼 선근(善根)을 가지고 모든 유정(有情)에게 평등히 회향(廻向)하면 구하는 불토(佛土)를 빨리 엄정(嚴淨)히 하여 유정(有情)을 원만히 이락(利樂)케 하느니라. 선현아 이 보살(菩薩)이 스스로 정계(淨戒) 바라밀다(波羅蜜多)를 행하여 또 타인(他人)에게 가르쳐 행하게 하며 안인바라밀다(安忍波羅蜜多)를 . . . . (내지).반야(般若 = 지혜(智慧) 바라밀다(波羅蜜多)를 . . . . . 구하는 불토(佛土)를 엄정(嚴淨)히 하고 원만히 유정(有情)을 이락(利樂)케 하느니라. 물론 여기서 말하는 무거운 티끌이란 신업(身業)으로서의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婬), 구업(口業)으로서의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舌), 악구(惡口)요 의업(意業)으로는 탐(貪), 진(嗔) 치(癡)의 십불선(十不善)이다. 따라서 불국토(佛國土)의 건설은 십불선(十不善)을 여의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음으로 스스로의 성취중생(成就衆生)과 더불어 같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버라밀(波羅蜜)이 우리가 닦아야 할 도(道)라 하면 불국토(佛國土)는 보살(菩薩)이 이 땅에 건설하여야 할 이상국토(理想國土)이다. 그리고 이런 것을 할 사람은 바로 우리 각자이다. 어찌 스스로 사명감(使命感)을 느끼지 않으리요. 그런데 이런 불국토(佛國土)는 구체적인 설명은 없어도 타방(他方)에도 있다고 설해져 있으니 예를 들면 소품반야(小品般若) 권 4에 <이와 같이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이 마음에 대승(大乘)을 즐겨 타방(他方)의 현재불(現在佛)앞에 설법(說法) 하시는 곳에 태어나고자 원하면 그 곳에서도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설함을 널리 들어 그 불토(佛土)에서도 역시 법(法)으로써 무량백천만(無量百千萬) 중생(衆生)에게 보이고 그들을 가르치고 이롭게 하며 기쁘게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머물게 하느니라.>고 한 것 등이 그것이니라. 이 타방불토(他方佛土) 사상(思想)은 소승(小乘)엔 없었던 것으로 대승(大乘) 특유의 사상(思想)이며 보살(菩薩)은 원(願)으로 인해 그 곳에 태어남을 알려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