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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적정인

구경사 0 246
4.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 : 열반(涅槃)이란? 음역(音譯)으로 니원(泥洹), 열반나(涅槃那)라고 쓰기도 하고 번역하여서는 적멸(寂滅), 멸도(滅度), 원적(圓寂), 적정(寂靜) 또는 멸(滅)이라고만 쓰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열반(涅槃)이나 적정(寂靜)은 같은 뜻이 된다. 니르반야란 말은 <불어서 끈다. 취멸(吹滅)>이라 던지 혹은 <불이 꺼진상태>를 나타내는 정도의 말이었느데 이말이 불교에 흡수되어서는 모든 번뇌(煩惱)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하고 미혹(迷惑)의 생사(生死)를 초월하여 불생불멸(不生不滅)을 체득한 불교 최고 이상의 경지를 나타내는 말로 심화(深化)되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는 그 과정을 살펴보기 위하여 원래의 뜻 중에서 <불> 즉 <타오르는 불>이란 개념을 염두에 두고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어 보자. 이것은 부처님께서 정각(正覺)을 이루신 고장인 마가다국의 우루벨라로 처음 들어오시어 그를 따르는 천여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니련선하(尼蓮禪河)가 바라보이는 상두산(象頭山)에 올라 설(說)하신 법문(法門)이다. 기록에 의하면 정각(正覺)을 이루신 부처님께서는 처음 녹야원(鹿野원)에 가셔서 교진여 등 오비구를 교화하신 다음 다시 벤네레스성(城)의 부호의 아들 야사 등 50여명을 교화하여 각기 그들에게 한 사람이 한 고장으로 가서 전도할 것을 말씀하신 후 부처님께서도 같은 목적을 가지고 이 곳에 오셨다고 하신다. <비구들이여 모든 것은 다 타느니라 비구들이여 모든것이 탄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비구들이여 눈(안 = 眼)이 탄다. 눈의 대상이 탄다. 눈이 닿는 곳 모든 것이 탄다. 무엇에 의해 타는가. 나는 탐욕의 불에 의해 타고, 노여움의 불에 의해 탄다고 말하고 싶다. 비구들이여 귀(이 = 耳)가 탄다. 귀의 대상이 탄다.귀가 닿은 곳 모든 것이 탄다. 무엇에 의해 타는가 나는 탐욕의 불에 의해 타고 어리석음의 불에 의해 타고 노(老). 사(死). 우(憂). 비(悲). 고(苦). 뇌(惱). 절망(絶望)의 불에 탄다고 말하고 싶다. 비구(比丘)들이여 코(비 = 鼻)가 탄다. . . 내지 마음(의 = 意)이 탄다. . . . .(잡아함경 권8. 13) 그리시고는 제자들을 향하여 한시라도 빨리 이러한 불에 타는 상대를 벗어 나도록 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불 이라늨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그리고 어찌하여 이 말이 이것에 반대되는 의미에서 쓰여졌는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여기에서 말하는 불이란 성냥불이나 장작불같은 물질적인 불이 아닌 탐진치(貪瞋痴)의 삼독심(三毒心)을 위시한 모든 번뇌(煩惱), 모든 고통에 얽매여 방황하는 심신(心身)이 극히 불안정한 상태를 비유하여 가르킨 말이며 <타오르는  불이 꺼진 상태>의 열반(涅槃)이란 말은 이러한 불안정한 상태를 떠난 안정된 심신(心身)의 상태를 나타낸 말이다. 실로 중생의 모든 고통은 이 탐진치(貪瞋痴)가 그 기본을 이룬다. 우리는  어쨌던간에 이 탐진치를 여의어 고해(苦海)를 벗어나야만 한다. 우리가 부처님 법을 배우는 목적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열반(涅槃)이란 말은 그만큼 자주 쓰이게 되었으며 자주 쓰이면 쓰일수록 그것은 비유의 말이란 개념을 점차 벗어나 궁극에는 <모든 번뇌를 떠난 무상안온(無上安穩)의 해탈(解脫)의 경지>를 나타내는 불교 고유의 용어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을 내세우는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는 앞에서 일체개고인(一切皆苦印)을 고찰하면서 일체(一切)가 개고(皆苦)로 돌아가는 원인은 모든 우주(宇宙) 인생의 만법(萬法)을 바로 보지 못하고 온갖 망심(妄心)을 내는데 있음을 알았다. 이것은 중생으로 보아서는 어쩔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고해를 떠나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苦) 또한 인연소생(因緣所生)이라 그 고를 만든 인연(因緣)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그 인연이 제거되었을 때에는 고라는 것은 자연히 없어지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고통을 떠난 그야말로 열반(涅槃)의 경지에 안주(安住)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스스로 증득하시였고 또 부처님을 따르든 많은 제자들도 이것을 증득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을 아라한(阿羅漢)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열반적정(涅槃寂靜)은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법인(法印)으로 세워지는 것이다. 따라서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삼법인(三法印)을 세울 때에는 미혹(迷惑)의 중생계(衆生界)가 아닌 정각(正覺)의 해탈계(解脫界)에서 현실을 판단한 것이라 하겠으며 12연기설(十二緣起說)로 보면 역관(逆觀)에 해당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 열반(涅槃)은 또한 유여열반(有餘涅槃)이니 무여열반(無餘涅槃)이니 하여 이종열반(二種涅槃)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유여열반(有餘涅槃)이라 함은 비록 열반(涅槃)을 증득 하였다고는 하지만 아직 사대 오온(四大 五蘊)으로 이룩된 업보(業報)의 몸이 남아 있다는 뜻에서 말하는 것이고. 무여열반(無餘涅槃)이라 함은 그 사대 오온(四大 五蘊)의 신심(身心)이 다한 사후(死後)에 길이 안온(安穩)한 경지에 이른다는 뜻에서 말하는 것이다. 후세 우리가 부처님의 죽음을 대반열밬(大般涅槃) 혹은 반열반(般涅槃)이라 하기도 하는데  대반열반(大般涅槃)은 큰 죽음이란 뜻이고 반열반(般涅槃)은 그냥 죽음 정도의 뜻이다. 그리고 더 후대에 오면 열반이란 말이 바로 부처님의 죽음을 말하는 것처럼 쓰여저 왔고 또 현재에 와서는 스님들의 죽음을 통상 열반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 모두 무여열반(無餘涅槃)에서 온 것이며  유여(有餘), 무여열반(無餘涅槃)을 나눈 자체가 이미 원래의 뜻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상으로 우리는 법인(法印)의 하나 하나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제 이것을 종합하여 보면 < 모든 현상계 제법(諸法)은 인연소생(因緣所生)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시간적으로는 무상(無常)하고 공간적으로는 무아(無我)이다. 그러나 이 이치를 여실(如實)히 보지 못하고 온갖 망심(妄心)에 사로잡히면 이 세계는 모두 고해(苦海)로 나타나는 것이요 반대로 이 것을 여실(如實)히 보고 망심(妄心)을 떠나 이것을 바르게 살려가면 곧 열반에 이른다는 것으로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현상계의 미혹(迷惑)으로 부터 열반적정계(涅槃寂靜界)에 이르도록 하는데에 그 뜻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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