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
구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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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4 19:48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
그렇다면 연기설(緣起設)이란 어떤 것인가. 연기설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12연기설인데 12연기설이란 <부처님은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처음 정각(正覺)을 이루신 후 또 다시 보리수 아래서 7일간을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채 해탈(解脫)의 즐거움을 받고 있었다. 그 때 부처님은 초야(初夜)에 연기의 이치를 순차(順次)로 또 역차(逆次)로 억염(憶念)해 보았다. 무명(無明)의 연(緣)으로 부터 행(行)이. 행(行)의 연(緣)으로 부터 식((識)이. 식(識)의 연(緣)으로 부터 명색(名色)이. 명색(名色)의 연(緣)으로 부터 육입(六入)이. 육입(六入)으로 부터 촉(觸)이. 촉(觸)의 연(緣)으로 부터 수(受)가. 수(受)의 연(緣)으로 부터 애(愛)가. 애(愛)의 연(緣)으로 부터 취(取)가. 취(取)의 연(緣)으로 부터 유(有)가. 유(有)의 연으로 부터 생(生)이. 생(生)의 연(緣)으로 부터 노사(老死) 우비(憂悲) 고뇌(苦惱) 절망(絶望)이 생기고, 이와 같이 하여 모든 괴로움 덩어리의 생기(生起)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욕(離欲)의 도(道)에 의하여 무명(無明)이 멸(滅)하므로 행(行)이 멸(滅)하고. 행(行)이 멸(滅)하므로 식(識)이 멸(滅)하고. 식(識)이 멸(滅)하므로 명색(名色)이 멸(滅)하고. 명색(名色)이 멸(滅)하므로 - - - 이와 같이 하여 괴로움 덩어리 모두의 멸진(滅盡)이 있는 것이다 라고. 이와 같이 부처님은 그 중야(中夜)에도 그 연기를 순역(順逆)으로 억념(憶念)하였다.>(五分律 卷15) 라고 되어 있는 바와 같이 중생의 괴로운 현실상(現實相)인 모든 고뇌를 떠나기 위해 그 발생과 소멸을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의 12지로써 풀어놓은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만 가지고는 이 12연기설이 뜻하는 바를 쉽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12지의 하나 하나를 먼저 알아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연기설이란 어디까지나 중생으로서의 모든 고통을 떠나기 위한 것이니만큼 역(逆)으로 노사(老死)에서 부터 알아보는 것이 편리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당면문제는 중생의 고통에 있었던 이상 이 노사(老死)에서 부터 문제를 삼았을 것이다. 이제 역(力)으로 12지의 하나 하나를 경론(經論)에 의해 간단히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1. 노사(老死) : 노사(老死)란 것은 중생(衆生)의 늙음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긴 하나 여기에서 말하는 노사(老死)란 그런 단순한 의미가 아닌 노사우비고우뇌(老死憂悲苦憂惱)로서 중생의 모든 고통을 대신하여 이르는 말이다. 즉 이것은 중생은 어쨌거나 괴롭다. 하는 모든 중생의 무상하고 변천하는 현실의 모습을 대표한 말이다. 그러기에 이것은 하나의 관념적이거나 객관적인 것이 아닌 모든 중생, 바로 나 자신에게 닥친 가장 진실한 당면 과제인 중생고(衆生苦)로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2. 생(生) : 중생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노사(老死)의 모든 고통은 무엇때문에 있는 것일까. 중생 고통의 조건은 생(生)이라고 한다. 생(生)이란 세상에 생명체를 받아 탄생하였다는 의미로 무상한 현실속에서의 생존의 시발점인 것이다. 그러므로 생(生)이란 한 없는 고통의 현실속에 중생으로서의 첫 시점(始點)인 것이며 노(老)는 그 순간부터의 과정이며 사(死)는 그 종점(終點)인 것이며 노(老)는 그 순간 순간부터의 과정이며 사(死)는 그 종국(終局)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생(生)이 있으므로 노사(老死)가 있고 노사(老死)는 생(生)에 위해 있다고 하지만 생(生)과 노사(老死)는 그대로 한 묶음이 되어 중생의 일생이 되는 것으로 생(生). 노사(老死)는 바로 중생으로서의 모든 고통을 대표하여 이르는 말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 병(病)을 더하여 생(生). 노(老). 병(病). 사(死)를 사고(四苦)라고 하는데 이것은 중생고(衆生苦)의 대표적인 것을 일관하여 말하는 것이다.
3. 유(有) : 그러면 생(生)은 무엇이 있으므로 있는가. 생 (生)을 있겠끔 하는 것은 유(有)라고 한다. 유(有)라는 것은 존재(存在)라는 뜻으로 집착에 얽매인 범부(梵夫)의 생존(生存)을 의미한다. 유(有)는 흔히 삼유(三有 = 三界)라 하여
ㄱ. 욕유(欲有 = 오욕(五欲)의 지배를 받아 생활하는 세계.
ㄴ. 색유(色有 = 욕유(欲有)와 같은 여러가지의 탐욕에 지배되는 세계는 아니나 아직 물질인 색상(色相)에 의해 생활하는 세계.
ㄷ. 무색유(無色有) = 색상(色相)도 없는 세계 즉 하등의 물질적 속박도 없는 순수한 정신적인 세계의 세가지로 구분하여 말하는데 이것은 어떤 객관적인 세계보다는 생(生). 노사(老死)를 포함하는 무상(無常) 천유(遷流)의 중생세간(衆生世間)을 객관화시켜 말하는,것으로 보아야 할지니 유(有)가 있으므로 생(生)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生)은 유(有)속에 그대로 포함되는 것이라 하겠다.
4. 취(取) : 취(取)라는 것은 취착(取着)의 뜻으로 그릇된 ,집착을 말한다. 즉 번뇌(煩惱)로 덮힌 범부의 생존. 유(有)는 이 그릇된 집착으로 말미암아 있다는 것이다. 취(取)는 흔히 넷으로 나누어 사취(四取)라고 하는데
ㄱ. 욕취(欲取 = 오욕경(五欲境)에 대한 집착.
ㄴ.견취(見取 = 그릇된 견해나 사상 학설 고집함.
ㄷ.계금취(戒禁取 = 그릇됭 계행(戒行)에 대해 진실 청정하다고 고집함.
ㄹ.아어취(我語取 = 아견(我見 아만(我慢) 등에 사로잡힌 자기의 주장을 바른 것이라고 고집함. 의 넷이 그것이다.
5.애(愛) : 그러면 취(取)는 무엇때문에 있는 것일까.그것은 애욕(愛欲)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애(愛)는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이 자기 욕망의 만족을 희구(希求)하는 치열한 갈애(渴愛)를 말한다. 중생이란 누구나가 다 그 나름대로의 욕망이 있다. 이것은 결코 바른 것일 수는 없으나 중생이면 누구나가 다 이 욕망을 만족시키려 동분서주하며 괴로움의 나날을 보낸다. (물론 성불(成佛)을 향한 원(願)과는 그 성질이 다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중생이면 다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욕심이라 할 수도 있는 것으로 (중생의 정적(情的) 번뇌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12연기설 중에서 정적(情的) 번뇌의 근본을 이루는 이 애욕(愛欲)이 앞으로 나올 지적(智的) 번뇌의 근본을 이루는 무명(無明)과 더불어 중요시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애(愛)에는 ㄱ.삼유(三有)의 어디엔가에 대한 애욕으로서의 一.욕유애(欲有愛). 二. 색유애(色有愛). 三. 무색유애(無色有愛)의 삼유(三有)의 삼유도 있고
ㄴ. 오욕의 만족을 얻고자 하는 욕애와 유견(有見) 상견(常見)을 가지고 이것을 실현 시키려는 유애(有愛)와
ㄷ. 무견(無見) 단견(斷見)을 가지고 이것을 실현시키려는 무유애(無有愛)도 있다.(계속)
그렇다면 연기설(緣起設)이란 어떤 것인가. 연기설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12연기설인데 12연기설이란 <부처님은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처음 정각(正覺)을 이루신 후 또 다시 보리수 아래서 7일간을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채 해탈(解脫)의 즐거움을 받고 있었다. 그 때 부처님은 초야(初夜)에 연기의 이치를 순차(順次)로 또 역차(逆次)로 억염(憶念)해 보았다. 무명(無明)의 연(緣)으로 부터 행(行)이. 행(行)의 연(緣)으로 부터 식((識)이. 식(識)의 연(緣)으로 부터 명색(名色)이. 명색(名色)의 연(緣)으로 부터 육입(六入)이. 육입(六入)으로 부터 촉(觸)이. 촉(觸)의 연(緣)으로 부터 수(受)가. 수(受)의 연(緣)으로 부터 애(愛)가. 애(愛)의 연(緣)으로 부터 취(取)가. 취(取)의 연(緣)으로 부터 유(有)가. 유(有)의 연으로 부터 생(生)이. 생(生)의 연(緣)으로 부터 노사(老死) 우비(憂悲) 고뇌(苦惱) 절망(絶望)이 생기고, 이와 같이 하여 모든 괴로움 덩어리의 생기(生起)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욕(離欲)의 도(道)에 의하여 무명(無明)이 멸(滅)하므로 행(行)이 멸(滅)하고. 행(行)이 멸(滅)하므로 식(識)이 멸(滅)하고. 식(識)이 멸(滅)하므로 명색(名色)이 멸(滅)하고. 명색(名色)이 멸(滅)하므로 - - - 이와 같이 하여 괴로움 덩어리 모두의 멸진(滅盡)이 있는 것이다 라고. 이와 같이 부처님은 그 중야(中夜)에도 그 연기를 순역(順逆)으로 억념(憶念)하였다.>(五分律 卷15) 라고 되어 있는 바와 같이 중생의 괴로운 현실상(現實相)인 모든 고뇌를 떠나기 위해 그 발생과 소멸을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의 12지로써 풀어놓은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만 가지고는 이 12연기설이 뜻하는 바를 쉽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12지의 하나 하나를 먼저 알아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연기설이란 어디까지나 중생으로서의 모든 고통을 떠나기 위한 것이니만큼 역(逆)으로 노사(老死)에서 부터 알아보는 것이 편리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당면문제는 중생의 고통에 있었던 이상 이 노사(老死)에서 부터 문제를 삼았을 것이다. 이제 역(力)으로 12지의 하나 하나를 경론(經論)에 의해 간단히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1. 노사(老死) : 노사(老死)란 것은 중생(衆生)의 늙음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긴 하나 여기에서 말하는 노사(老死)란 그런 단순한 의미가 아닌 노사우비고우뇌(老死憂悲苦憂惱)로서 중생의 모든 고통을 대신하여 이르는 말이다. 즉 이것은 중생은 어쨌거나 괴롭다. 하는 모든 중생의 무상하고 변천하는 현실의 모습을 대표한 말이다. 그러기에 이것은 하나의 관념적이거나 객관적인 것이 아닌 모든 중생, 바로 나 자신에게 닥친 가장 진실한 당면 과제인 중생고(衆生苦)로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2. 생(生) : 중생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노사(老死)의 모든 고통은 무엇때문에 있는 것일까. 중생 고통의 조건은 생(生)이라고 한다. 생(生)이란 세상에 생명체를 받아 탄생하였다는 의미로 무상한 현실속에서의 생존의 시발점인 것이다. 그러므로 생(生)이란 한 없는 고통의 현실속에 중생으로서의 첫 시점(始點)인 것이며 노(老)는 그 순간부터의 과정이며 사(死)는 그 종점(終點)인 것이며 노(老)는 그 순간 순간부터의 과정이며 사(死)는 그 종국(終局)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생(生)이 있으므로 노사(老死)가 있고 노사(老死)는 생(生)에 위해 있다고 하지만 생(生)과 노사(老死)는 그대로 한 묶음이 되어 중생의 일생이 되는 것으로 생(生). 노사(老死)는 바로 중생으로서의 모든 고통을 대표하여 이르는 말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 병(病)을 더하여 생(生). 노(老). 병(病). 사(死)를 사고(四苦)라고 하는데 이것은 중생고(衆生苦)의 대표적인 것을 일관하여 말하는 것이다.
3. 유(有) : 그러면 생(生)은 무엇이 있으므로 있는가. 생 (生)을 있겠끔 하는 것은 유(有)라고 한다. 유(有)라는 것은 존재(存在)라는 뜻으로 집착에 얽매인 범부(梵夫)의 생존(生存)을 의미한다. 유(有)는 흔히 삼유(三有 = 三界)라 하여
ㄱ. 욕유(欲有 = 오욕(五欲)의 지배를 받아 생활하는 세계.
ㄴ. 색유(色有 = 욕유(欲有)와 같은 여러가지의 탐욕에 지배되는 세계는 아니나 아직 물질인 색상(色相)에 의해 생활하는 세계.
ㄷ. 무색유(無色有) = 색상(色相)도 없는 세계 즉 하등의 물질적 속박도 없는 순수한 정신적인 세계의 세가지로 구분하여 말하는데 이것은 어떤 객관적인 세계보다는 생(生). 노사(老死)를 포함하는 무상(無常) 천유(遷流)의 중생세간(衆生世間)을 객관화시켜 말하는,것으로 보아야 할지니 유(有)가 있으므로 생(生)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生)은 유(有)속에 그대로 포함되는 것이라 하겠다.
4. 취(取) : 취(取)라는 것은 취착(取着)의 뜻으로 그릇된 ,집착을 말한다. 즉 번뇌(煩惱)로 덮힌 범부의 생존. 유(有)는 이 그릇된 집착으로 말미암아 있다는 것이다. 취(取)는 흔히 넷으로 나누어 사취(四取)라고 하는데
ㄱ. 욕취(欲取 = 오욕경(五欲境)에 대한 집착.
ㄴ.견취(見取 = 그릇된 견해나 사상 학설 고집함.
ㄷ.계금취(戒禁取 = 그릇됭 계행(戒行)에 대해 진실 청정하다고 고집함.
ㄹ.아어취(我語取 = 아견(我見 아만(我慢) 등에 사로잡힌 자기의 주장을 바른 것이라고 고집함. 의 넷이 그것이다.
5.애(愛) : 그러면 취(取)는 무엇때문에 있는 것일까.그것은 애욕(愛欲)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애(愛)는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이 자기 욕망의 만족을 희구(希求)하는 치열한 갈애(渴愛)를 말한다. 중생이란 누구나가 다 그 나름대로의 욕망이 있다. 이것은 결코 바른 것일 수는 없으나 중생이면 누구나가 다 이 욕망을 만족시키려 동분서주하며 괴로움의 나날을 보낸다. (물론 성불(成佛)을 향한 원(願)과는 그 성질이 다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중생이면 다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욕심이라 할 수도 있는 것으로 (중생의 정적(情的) 번뇌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12연기설 중에서 정적(情的) 번뇌의 근본을 이루는 이 애욕(愛欲)이 앞으로 나올 지적(智的) 번뇌의 근본을 이루는 무명(無明)과 더불어 중요시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애(愛)에는 ㄱ.삼유(三有)의 어디엔가에 대한 애욕으로서의 一.욕유애(欲有愛). 二. 색유애(色有愛). 三. 무색유애(無色有愛)의 삼유(三有)의 삼유도 있고
ㄴ. 오욕의 만족을 얻고자 하는 욕애와 유견(有見) 상견(常見)을 가지고 이것을 실현 시키려는 유애(有愛)와
ㄷ. 무견(無見) 단견(斷見)을 가지고 이것을 실현시키려는 무유애(無有愛)도 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