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제
구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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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4 08:28
1. 천제(闡提 = 선근(善根)의 종자(種子)가 없어 성불(成佛)할 수 없는 이. 단선근(斷善根)이라 함)에 두 종류가 있으니
(1)인과(因果)의 도리(道理)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 대해선 불멸(不滅)을 설(說)하고
(2)사람은 아무리 죽더라도 반드시 인간계에 태어난다고 하는 이들에게 대해선 불생(不生)을 설(說)한다.
2. 성문(聲聞)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1)생사(生死)를 두려워 하여 이것을 급히 끊고자 하는 이들에게 대해선 부단(不斷)을 설(說)하고.
(2)영원히 적멸무위(寂滅無爲)의 열반(涅槃)에 상주(常住)코자 하는 이들을 위해선 불상(不常)을 설(說)한다.
3. 외도(外道)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1)나(아 = 我)와 오온(五蘊)이 하나라고 하는 이들에게 대해선 불일(不一)을 설(說)하고.
(2)나(아 = 我)와 오온(五蘊)이 다르다고 하는 이들에게 대해선 불이(不異)를 설(說)한다.
4. 독각(獨覺)과 초심보살(初心菩薩)에도
(1) 인연(因緣)으로 말미암아 그에 따른 과보(果報)의 세계(世界)에 나는 것이 온다(래= 來)라고 하는 이들에게 대해선 불래(不來)를 설(說)하고
(2) 삼계(三界) 육도(六道)를 벗어나는 것을 간다(거 = 去)고 하는 이들에 대해선 불거(不去)를 설(說)한다고 한다. 아무튼 이 팔불중도(八不中道)의 설(說)을 본다면 이상 여덟가지 집착 중에 단 하나라도 가지고 있으면 그는 결코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지금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곧 버려야 할 것이다. 다음엔 이 팔불중도(八不中道)를 그 깊이에 따라 나눈 것에 대해 알아보자. 대승현론(大乘玄論)
1. 참으로 나고(실생 = 實生) 참으로 없어진다.(실멸 = 實滅)는 것은 이것을 단속(單俗)이라 한다.
2. 나는 것도 아니요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 이것을 단진(單眞)이라 한다.
3. 만법(萬法)은 인연(因緣)의 집산(集散)으로 생멸(生滅)하는 것이기에 세제(世諦)로 보면 참으로 생멸(生滅)이 있음이 아니라 (비생비멸 = 非生非滅) 이것을 세제중도(世諦中道)라고 한다.
4. 그런데 세제(世諦)로써는 인연(因緣)의 집산(集散)이라 비생비멸(非生非滅)이지만 진제(眞諦)로 보면 공(空)이라 참으로 비생비멸(非生非滅)도 아닌 것(비불생 비불멸 = 非不生 非不滅)이다. 이것을 진제중도(眞諦中道)라고 한다.
5. 그렇기에 우리는 세제(世諦)와 진제(眞諦)를 따로 나누어서 볼 수만은 없다. 이것은 동시(同時) 동처(同處)에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법(萬法)은 세제(世諦)와 진제(眞諦)를 함께 구비하고 있으니 속제(俗諦)로 보아 유(有)라고 하여 생멸(生滅)이 참으로 없는 것도 아니니 (비불생멸 = 非不生滅)이 비생멸(非生滅), 비불생멸(非不生滅)을 이제합명중도(二諦合明中道)라고 한다. 이상은 생멸(生滅)을 예로 든 것이지만 나머지 상단(常斷), 일이(一異), 출거(出去)도 마찬가지이다. 실로 만유(萬有)는 공(空)이기에 가유(假有)이며 가유(假有)이기에 공(空)이라. 이것이 중도(中道)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만유(萬有)는 진제(眞諦)의 공(空)은 속제(俗諦)의 유(有)요, 속제(俗諦)의 유(有)는 진제(眞諦)의 공(空)이 되는 것이니 이 두면을 한꺼번에 보아 어느 한 쪽에도 치유침이 없을 때 그것을 중도(中道)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근본적(根本的)인 이유는 만유(萬有)는 인연소생(因緣所生) 이라는데 있다. 공(空). 가(假). 중(中)을 흔히 삼제(三諦)라고도 부르거니와 중론(中論)에 <뭇 인연(因緣)으로 나는 법(法)을 나는 곧 공(空)이라 설(說)하기도 하고 또한 가명(假名)이라 하기도 하며 또한 중도(中道)의 이치라 하기도 한다.> 고 한 것은 바로 이 뜻을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 하나 더 덧붙인다면 모든 불보살(佛菩薩)은 이 세제(世諦)와 진제(眞諦)로 인하여 중생(衆生)을 교화(敎化)하는 지혜(智慧)인 방편혜(方便慧)와 스스로 진리(眞理)를 달관하는 실혜(實慧)의 이혜(二慧)를 구족한다고 하는 것이다. 온갖 차별상을 통달하는 방편혜(方便慧) 즉 권지(權智)는 (유 = 有)로서의 세제(世諦)를 모으면 안 되는 것이요. 평등한 진리(眞理)를 달관하는 실혜(實慧) 즉 실지(實智)는 공(空)으로서의 진제(眞諦)를 모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이제(二諦)로서 이혜(二慧)가 구족되었을 때 이타행(利他行)과 자리행(自利行)이 또한 원만히 구족되어 이것으로 부터 복혜(福慧)가 구족되는 것이니 이 이제(二諦)는 이혜(二慧)를, 이혜(二慧)는 복혜(福慧)를 갖추게 하는 것이 된다. 곧 삼론현의(三論玄義)에 <삼지(三智)를 다 취하여 불(佛)이 되니 이제(二諦)가 능히 이지(二智)를 낳는다. 그러므로 이제(二諦)로써 어머니를 삼는다.> 라고 한 것 등이 그것이다. 즉 불(佛)의 모(母)를 이지(二智)라 한다면 이제(二諦)는 그 조모(祖母)가 된다고 하겠다.
(1)인과(因果)의 도리(道理)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 대해선 불멸(不滅)을 설(說)하고
(2)사람은 아무리 죽더라도 반드시 인간계에 태어난다고 하는 이들에게 대해선 불생(不生)을 설(說)한다.
2. 성문(聲聞)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1)생사(生死)를 두려워 하여 이것을 급히 끊고자 하는 이들에게 대해선 부단(不斷)을 설(說)하고.
(2)영원히 적멸무위(寂滅無爲)의 열반(涅槃)에 상주(常住)코자 하는 이들을 위해선 불상(不常)을 설(說)한다.
3. 외도(外道)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1)나(아 = 我)와 오온(五蘊)이 하나라고 하는 이들에게 대해선 불일(不一)을 설(說)하고.
(2)나(아 = 我)와 오온(五蘊)이 다르다고 하는 이들에게 대해선 불이(不異)를 설(說)한다.
4. 독각(獨覺)과 초심보살(初心菩薩)에도
(1) 인연(因緣)으로 말미암아 그에 따른 과보(果報)의 세계(世界)에 나는 것이 온다(래= 來)라고 하는 이들에게 대해선 불래(不來)를 설(說)하고
(2) 삼계(三界) 육도(六道)를 벗어나는 것을 간다(거 = 去)고 하는 이들에 대해선 불거(不去)를 설(說)한다고 한다. 아무튼 이 팔불중도(八不中道)의 설(說)을 본다면 이상 여덟가지 집착 중에 단 하나라도 가지고 있으면 그는 결코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지금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곧 버려야 할 것이다. 다음엔 이 팔불중도(八不中道)를 그 깊이에 따라 나눈 것에 대해 알아보자. 대승현론(大乘玄論)
1. 참으로 나고(실생 = 實生) 참으로 없어진다.(실멸 = 實滅)는 것은 이것을 단속(單俗)이라 한다.
2. 나는 것도 아니요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 이것을 단진(單眞)이라 한다.
3. 만법(萬法)은 인연(因緣)의 집산(集散)으로 생멸(生滅)하는 것이기에 세제(世諦)로 보면 참으로 생멸(生滅)이 있음이 아니라 (비생비멸 = 非生非滅) 이것을 세제중도(世諦中道)라고 한다.
4. 그런데 세제(世諦)로써는 인연(因緣)의 집산(集散)이라 비생비멸(非生非滅)이지만 진제(眞諦)로 보면 공(空)이라 참으로 비생비멸(非生非滅)도 아닌 것(비불생 비불멸 = 非不生 非不滅)이다. 이것을 진제중도(眞諦中道)라고 한다.
5. 그렇기에 우리는 세제(世諦)와 진제(眞諦)를 따로 나누어서 볼 수만은 없다. 이것은 동시(同時) 동처(同處)에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법(萬法)은 세제(世諦)와 진제(眞諦)를 함께 구비하고 있으니 속제(俗諦)로 보아 유(有)라고 하여 생멸(生滅)이 참으로 없는 것도 아니니 (비불생멸 = 非不生滅)이 비생멸(非生滅), 비불생멸(非不生滅)을 이제합명중도(二諦合明中道)라고 한다. 이상은 생멸(生滅)을 예로 든 것이지만 나머지 상단(常斷), 일이(一異), 출거(出去)도 마찬가지이다. 실로 만유(萬有)는 공(空)이기에 가유(假有)이며 가유(假有)이기에 공(空)이라. 이것이 중도(中道)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만유(萬有)는 진제(眞諦)의 공(空)은 속제(俗諦)의 유(有)요, 속제(俗諦)의 유(有)는 진제(眞諦)의 공(空)이 되는 것이니 이 두면을 한꺼번에 보아 어느 한 쪽에도 치유침이 없을 때 그것을 중도(中道)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근본적(根本的)인 이유는 만유(萬有)는 인연소생(因緣所生) 이라는데 있다. 공(空). 가(假). 중(中)을 흔히 삼제(三諦)라고도 부르거니와 중론(中論)에 <뭇 인연(因緣)으로 나는 법(法)을 나는 곧 공(空)이라 설(說)하기도 하고 또한 가명(假名)이라 하기도 하며 또한 중도(中道)의 이치라 하기도 한다.> 고 한 것은 바로 이 뜻을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 하나 더 덧붙인다면 모든 불보살(佛菩薩)은 이 세제(世諦)와 진제(眞諦)로 인하여 중생(衆生)을 교화(敎化)하는 지혜(智慧)인 방편혜(方便慧)와 스스로 진리(眞理)를 달관하는 실혜(實慧)의 이혜(二慧)를 구족한다고 하는 것이다. 온갖 차별상을 통달하는 방편혜(方便慧) 즉 권지(權智)는 (유 = 有)로서의 세제(世諦)를 모으면 안 되는 것이요. 평등한 진리(眞理)를 달관하는 실혜(實慧) 즉 실지(實智)는 공(空)으로서의 진제(眞諦)를 모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이제(二諦)로서 이혜(二慧)가 구족되었을 때 이타행(利他行)과 자리행(自利行)이 또한 원만히 구족되어 이것으로 부터 복혜(福慧)가 구족되는 것이니 이 이제(二諦)는 이혜(二慧)를, 이혜(二慧)는 복혜(福慧)를 갖추게 하는 것이 된다. 곧 삼론현의(三論玄義)에 <삼지(三智)를 다 취하여 불(佛)이 되니 이제(二諦)가 능히 이지(二智)를 낳는다. 그러므로 이제(二諦)로써 어머니를 삼는다.> 라고 한 것 등이 그것이다. 즉 불(佛)의 모(母)를 이지(二智)라 한다면 이제(二諦)는 그 조모(祖母)가 된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