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승불교
구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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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0 21:03
소승불교(小乘佛敎)의 후기(後記)
이상으로 소승불교(小乘佛敎)에 대한 고찰을 모두 마친다. 물론 소승불교시대(小乘佛敎時代)의 중요한 사상으로 이 밖에도 연기론(緣起論) 즉 현상론(現象論)인 업감연기론(業感緣起論)과 실상론(實相論) 즉 본체론(本体論)인 삼세실유론(三世實有論)등이 있으나 이것은 뒤의 연기론편(緣起論編)으로 미룬다. 소승(小乘), 그것은 대승(大乘)이라 자처한 사람들이 무상무비(無上無比)의 부처님 교법(敎法)을 가지고도 소승화(小乘化)한 사람들에게 폄칭(貶稱)으로 붙여준 이름이다. 그것은 그들이 물론 교화(敎化)를 안한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보아서 부처님의 본 뜻을 잊어버리고 또한 이타적(利他的)인 면(面)을 등한시하고 자리적(自利的)인 면에 기울어졌기 때문이였다. 소승(小乘)의 사상(思想)은 어디까지나 아라한(阿羅漢)이다. 그리고 그 아라한(阿羅漢)은 삼계(三界)의 번뇌(煩惱)를 다 끊고 해탈(解脫)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사 그것이 자리적(自利的)인 것에 그친다. 하더라도 계율(戒律)에서도 나타나지만 삼계(三界)를 벗어나려는 그들의 철저한 수행(修行)면은 배워야 할 것이다. 대승(大乘)의 이타(利他)란 것은 자리(自利)를 무시한 이타(利他)가 아니다. 자기(自己) 자신(自身)의 수행(修行)이 없이 이타행(利他行)을 부르짓는다는 것은 하나의 모순일 뿐 이타(利他)가 이타(利他)다웁게 되려면 스스로 쌓은 또 쌓아가는 철저한 수행력(修行力)을 밑바침으로 하여 이루워져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어디에 가서 물어 보아도 대승불교국가(大乘佛敎國家)라고 한다. 소승불교국가(小乘佛敎國家)라고 하는 사람은 아직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그러면 과연 우리나라 전 불교도(佛敎徒)들은 출가(出家)이건 재가(在家)이건 한결같이 다 보살(菩薩)로서 보살행(菩薩行)을 철저히 하고 있는가.? 하지는 못하여도 할려고는 꾸준히 노력은 하고 있는가, 자신부터 한 번 냉철히 생각해 보자. 다시 말하면 소승(小乘)은 아라한(阿羅漢)을 이상으로 하여 삼계(參界)의 고해(苦海)를 벗어나 해탈(解脫)하는 것이 목적이요. 대승(大乘)은 부처님의 본의(本意)로 보살(菩薩)과 불(佛)을 이상으로 하여 모든 중생(衆生)과 함께 불(佛)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 보살(菩薩)은 만중생을 건지기 위하여 방편(方便)으로 번뇌(煩惱)를 남겨 삼계(三界)에 수생(受生)한다고 하니, 현재(現在)에 우리들은 모두 다는 모르지만 스스로 자신있게 해탈하였다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으니 과연 보살행(菩薩行)을 실천하고자 방편으로 번뇌(煩惱)를 남겨둔 것인가. 번뇌(煩惱)가 즉 보리(菩提)라는 자유경(自由境)에서 무애(無碍)한 것인가. 아니면 자리적(自利的)이라곤 하지만 소승(小乘)이라 불리운 아라한(阿羅漢)이 되기 위한 수행(修行)마저도 안 하여 못 끊는 것인가. 우선 자신에게 부터 돌아가 보자. 불법(佛法)의 수행(修行)은 자리적(自利的)인 것이라 하여 우리가 흔히 자기적(自己的)이라 부르는 그런 각박한 성질의 것은 아니요 이타적(利他的)인 것이라 하여 구호(口號)의 제창같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철저한 수행(修行), 그야말로 피와 땀으로 얻어지는 것이라야 한다. 현재(現在)의 우리는 어쨌던 바쁜 시대에 살고 있다. 복잡해지는 사회, 나를 잃어 버리는 사회, 많은 날들이 나를 한 번 제대로 생각해 볼 시간도 없이 무엇엔가 쭞기듯 지나가기도 한다. 그러니 마음도 흐려지고 몸도 고달퍼 져 인생(人生)의 정도(正道)가 무엇이지 생각해 볼 시간적(時間的)인 여유마져도 갖기 힘들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만 살 수는 없다. 우리 각자의 인생은 누가 대신 살아줄 사람이 없는 자기에겐 유일한 것이거니와 이 인생은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론 모두가 다 내일은 보다 더 잘 살아보려는 노력이겠지만, 사회의 일원(一員)임을 명심하고 보다 더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올바르고 온전하게 살리는 길을 외면해서도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중생(衆生)이라면 아직은 삼계(三界)의 윤회(輪廻) 속에 있는 몸, 한 없이 일어나는 번뇌(煩惱)와 고통(苦痛)은 언제 끊을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세간일에 바빠도 틈을 내어 배우고 닦아야 할 것이다. 배우고 닦는 마당엔 어느 것을 버릴수가 없다. 소승(小乘)에도 대승(大乘)에도 그대로 다 배우고 닦아야 할 것은 있는 것이다. 이제 소승불교(小乘佛敎)의 사상(思想)을 지금까지 배워 왔으니 각자 취사(取捨)할 것은 모두 다르겠지만 배워야 할 것은 배우는 것이 수행자(修行者)로서의 도리(道理)가 아닐까 한다. 그 위대한 자비구세(慈悲救世)의 부처님의 가르침은 결코 소승화(小乘化)될 수도 없고 또 소승화(小乘化)되는 것을 원하지도 않지만 대승(大乘)이란 이름 아래 자칫 잘못하여 개인의 수행(修行)마저 흐려지게 될 염려도 우리에겐 혹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도 조금은 생긴다. 더러운 물로 더러운 못(호 = 湖)을 맑게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이상으로 소승불교(小乘佛敎)에 대한 고찰을 모두 마친다. 물론 소승불교시대(小乘佛敎時代)의 중요한 사상으로 이 밖에도 연기론(緣起論) 즉 현상론(現象論)인 업감연기론(業感緣起論)과 실상론(實相論) 즉 본체론(本体論)인 삼세실유론(三世實有論)등이 있으나 이것은 뒤의 연기론편(緣起論編)으로 미룬다. 소승(小乘), 그것은 대승(大乘)이라 자처한 사람들이 무상무비(無上無比)의 부처님 교법(敎法)을 가지고도 소승화(小乘化)한 사람들에게 폄칭(貶稱)으로 붙여준 이름이다. 그것은 그들이 물론 교화(敎化)를 안한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보아서 부처님의 본 뜻을 잊어버리고 또한 이타적(利他的)인 면(面)을 등한시하고 자리적(自利的)인 면에 기울어졌기 때문이였다. 소승(小乘)의 사상(思想)은 어디까지나 아라한(阿羅漢)이다. 그리고 그 아라한(阿羅漢)은 삼계(三界)의 번뇌(煩惱)를 다 끊고 해탈(解脫)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사 그것이 자리적(自利的)인 것에 그친다. 하더라도 계율(戒律)에서도 나타나지만 삼계(三界)를 벗어나려는 그들의 철저한 수행(修行)면은 배워야 할 것이다. 대승(大乘)의 이타(利他)란 것은 자리(自利)를 무시한 이타(利他)가 아니다. 자기(自己) 자신(自身)의 수행(修行)이 없이 이타행(利他行)을 부르짓는다는 것은 하나의 모순일 뿐 이타(利他)가 이타(利他)다웁게 되려면 스스로 쌓은 또 쌓아가는 철저한 수행력(修行力)을 밑바침으로 하여 이루워져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어디에 가서 물어 보아도 대승불교국가(大乘佛敎國家)라고 한다. 소승불교국가(小乘佛敎國家)라고 하는 사람은 아직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그러면 과연 우리나라 전 불교도(佛敎徒)들은 출가(出家)이건 재가(在家)이건 한결같이 다 보살(菩薩)로서 보살행(菩薩行)을 철저히 하고 있는가.? 하지는 못하여도 할려고는 꾸준히 노력은 하고 있는가, 자신부터 한 번 냉철히 생각해 보자. 다시 말하면 소승(小乘)은 아라한(阿羅漢)을 이상으로 하여 삼계(參界)의 고해(苦海)를 벗어나 해탈(解脫)하는 것이 목적이요. 대승(大乘)은 부처님의 본의(本意)로 보살(菩薩)과 불(佛)을 이상으로 하여 모든 중생(衆生)과 함께 불(佛)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 보살(菩薩)은 만중생을 건지기 위하여 방편(方便)으로 번뇌(煩惱)를 남겨 삼계(三界)에 수생(受生)한다고 하니, 현재(現在)에 우리들은 모두 다는 모르지만 스스로 자신있게 해탈하였다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으니 과연 보살행(菩薩行)을 실천하고자 방편으로 번뇌(煩惱)를 남겨둔 것인가. 번뇌(煩惱)가 즉 보리(菩提)라는 자유경(自由境)에서 무애(無碍)한 것인가. 아니면 자리적(自利的)이라곤 하지만 소승(小乘)이라 불리운 아라한(阿羅漢)이 되기 위한 수행(修行)마저도 안 하여 못 끊는 것인가. 우선 자신에게 부터 돌아가 보자. 불법(佛法)의 수행(修行)은 자리적(自利的)인 것이라 하여 우리가 흔히 자기적(自己的)이라 부르는 그런 각박한 성질의 것은 아니요 이타적(利他的)인 것이라 하여 구호(口號)의 제창같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철저한 수행(修行), 그야말로 피와 땀으로 얻어지는 것이라야 한다. 현재(現在)의 우리는 어쨌던 바쁜 시대에 살고 있다. 복잡해지는 사회, 나를 잃어 버리는 사회, 많은 날들이 나를 한 번 제대로 생각해 볼 시간도 없이 무엇엔가 쭞기듯 지나가기도 한다. 그러니 마음도 흐려지고 몸도 고달퍼 져 인생(人生)의 정도(正道)가 무엇이지 생각해 볼 시간적(時間的)인 여유마져도 갖기 힘들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만 살 수는 없다. 우리 각자의 인생은 누가 대신 살아줄 사람이 없는 자기에겐 유일한 것이거니와 이 인생은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론 모두가 다 내일은 보다 더 잘 살아보려는 노력이겠지만, 사회의 일원(一員)임을 명심하고 보다 더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올바르고 온전하게 살리는 길을 외면해서도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중생(衆生)이라면 아직은 삼계(三界)의 윤회(輪廻) 속에 있는 몸, 한 없이 일어나는 번뇌(煩惱)와 고통(苦痛)은 언제 끊을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세간일에 바빠도 틈을 내어 배우고 닦아야 할 것이다. 배우고 닦는 마당엔 어느 것을 버릴수가 없다. 소승(小乘)에도 대승(大乘)에도 그대로 다 배우고 닦아야 할 것은 있는 것이다. 이제 소승불교(小乘佛敎)의 사상(思想)을 지금까지 배워 왔으니 각자 취사(取捨)할 것은 모두 다르겠지만 배워야 할 것은 배우는 것이 수행자(修行者)로서의 도리(道理)가 아닐까 한다. 그 위대한 자비구세(慈悲救世)의 부처님의 가르침은 결코 소승화(小乘化)될 수도 없고 또 소승화(小乘化)되는 것을 원하지도 않지만 대승(大乘)이란 이름 아래 자칫 잘못하여 개인의 수행(修行)마저 흐려지게 될 염려도 우리에겐 혹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도 조금은 생긴다. 더러운 물로 더러운 못(호 = 湖)을 맑게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