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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보은(三寶恩)

구경사 0 302
4. 삼보은(三寶恩)
위의 부모은(父母恩), 중생은(衆生恩), 국왕은(國王恩)이 세간적(世間的)인 것에 반해 이 삼보은(三寶恩)은 출세간적(出世間的)인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이 불(佛), 법(法), 승(僧)의 삼보(三寶)만이 우리로 하여금 생사(生死)의 윤회(輪廻)를 영단(永斷)하고 열반(涅槃)의 저 언덕에 이르도록 인도하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보(三寶)에 대한 것은 앞에서도 이미 누누히 나왔으므로 여기에서 다시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경(經)에 나온 그 일부의 내용을 적어봄으로써 그 은의(恩義)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본(本) 경(經)에서는 삼보(三寶)에 대해 <삼유(三有)의 업과(業果)는 영원(永遠)히 끊어 남음이 없고 공덕(功德)의 보산(寶山)은 높고 높아 일체(一切)를 알지 못하며 그 공덕(功德)의 깊고 깊음은 대해(大海)와 같고 그 지혜(智慧)의 걸림 없음은 허공(虛空)과 같다. 그러므로 신통변화(神通變化)하여 온 세간(世間)에 충만(充滿)하며 광명(光明)은 시방삼세(十方삼世)에 두루 비친다. 그러나 일체(一切)의 중생(衆生)은 번뇌업장(煩惱業障)으로 인하여 깨닫지 못하고 고해(苦海)에 깊이 빠져 생사(生死)의 괴로움이 다함이 없으니 이에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여 대선사(大船師)가 되어 능히 애류(愛流)를 끊고 피안(彼岸)에 초승(超昇)케 한다. 그러므로 지혜(智慧)있는 이들은 삼보(三寶)를 우러러보게 되는 것이다.> 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또 불(佛), 법(法), 승(僧)의 삼자(三者)를 모두 보배(보 = 寶)라 하는 이유에 대해선
ㅣ.견뢰(堅牢) : 삼보(三寶)는 굳고(견 = 堅) 굳어서(뢰 = 牢) 외도(外道)나 천마(天魔)가 능히 파괴하지 못한다.
2. 무구(無垢) : 번뇌(煩惱)의 더러움(구 = 垢)을 멀리 여의어 하나도 없다.
3.여락(與樂) : 모든 중생(衆生)에게 세간(世間) 출세간(出世間)의 즐겨움을 준다. 
4. 난우(難遇) : 업장(業障)이 깊고 두터운 중생(衆生)은 만겁(萬劫)에도 만나기 어렵다.
5. 능파(能破) : 모든 세간(世間)의 모든 빈고(貧苦)를 능히 깨트려 준다.
6. 위덕(威德) : 육신통(六神通)을 구족(具足)하여 능히 사마(四魔)를 항복 받는다.
7. 만원(萬願) : 중생(衆生)이 닦은 바 선원(善願)을 능히 만족 시켜 준다.
8. 장엄(莊嚴) : 능히 법왕(法王)의 보리보궁(菩提寶宮)을 장엄(莊嚴)한다.
9. 최묘(最妙) : 모든 세간(世間)의 가장 좋은 보배보다도 초월(超越)한다.
10. 불변(不變) : 세간(世間)의 팔풍(八風)도 능히 경동(傾動)치 못하게 한다. 는 등의 십덕(十德)을 구족(具足)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여 있으며 이 삼보(三寶)가 세상에 출현하여 있는 이유는 오로지 일체 중생(衆生)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아무튼 불자(佛子)라면 잊을 사람도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이 삼보(三寶)의 은의(恩義)를 잊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이상으로 지은보은행(知恩報恩行)에 대한 설명을 모두 마친다. 그러나 한가지 유의할 것은 이 지은보은행(知恩報恩行)이 비록 세간적인 것이긴 하나 위에서 고찰해본대로 여기엔 출세간적(出世間的)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불교(佛敎) 목적이 단순히 세간적인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출세간까지로 확대 상승시키는데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우리는 앞에 말한 <진정한 지은보은자(知恩報恩者)는 참으로 부처님 뿐이다.> 라는 말을 다시 한번 음미하여 보살행(菩薩行)으로서 나온 이 지은보은행(知恩報恩行)을 일체(一切) 중생(衆生)과 더불어 부지런히 닦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불교(佛敎)를 가르켜 자비(慈悲)의 종교(宗敎)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불자(佛子)는 대자대비(大慈大悲)로 일체 중생을 건저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은혜(恩惠)를 모르고 또 은혜(恩惠)에 보답할 줄 모른다면 과연 거기에서 자비(慈悲)가 나올 수 있을까. 또 대자대비(大慈大悲)를 외치는 사람은 조그만 은혜(恩惠)는 무시해도 좋을까. 그리고 궁극적으로 보아서 지은보은(知恩報恩)의 원만성취(圓滿成就)는 일체 중생을 건지는, 대자대비(大慈大悲)와 별개의 것일까. 이 기회에 한 번 조용히 생각해 볼 일이다. 물론 자신의 참다운 수행(修行)을 위하여 그리고 부처님과 같은 대자대비(大慈大悲)로 높은 차원에서 지은보은(知恩報恩)을 하기 위하여 일시 방편으로 수도(修道)에 들어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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