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생설(往生說)
구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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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9 10:17
3. 왕생설(往生說) : 법장 비구(法藏比丘)의 본원(本願)인 사십팔원(四十八願)중에 사십삼원(四十三願)이 섭중생원(攝衆生願)이고 이 가운데는 <나의 불토(佛土)에 태어나는 이는 . . . . . 하고 단서를 단 것이 많을 뿐만 아니라 특히 제십팔원(第十八願)은 <어떤 중생(衆生)이던지 지극한 마음으로 내 불국토(佛國土)를 믿고 좋아하여 와서 태어나고자 하는 이는 내 이름을 열번만 불러도 왕생(往生) 하게 될 것> 이라는 십념왕생원(十念往生願)이요 제십구원(第十九願)은 <보리심(菩提心)을 내어 여러가지 공덕을 닦고 지극한 마음으로 원을 세워 내 불국토(佛國土)에 태어나려는 중생은 그들이 임종할 때 내가 대중과 함께 가서 그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임종현전원(臨終現前願)이기에 극락정토(極樂淨土)에의 왕생(往生) 사상(思想)은 고래(古來)로 상당히 중요한 것으로 여겨져 왔고 지금도 누구나가 다 그 곳에 왕생(往生) 하기를 원(願)하고 있다. 그런데 극락(極樂)의 이러한 본원(本願)에 의해 이룩된 것인 만큼 경(經) 도처에 이 곳에의 왕생(往生)에 대해 설해저 있으니 <사리불(舍利弗)이여, 극락세계(極樂世界)에 태어나는 중생(衆生)들은 다 보리심(菩提心)에서 물러나지 않는 이들이며 그 중엔 일생보처(一生補處)의 지위에 오른 이들이 한량없이 많다. 이 말을 들은 중생(衆生)들은 마땅히 서원(誓願)을 세워 그 국토(國土)에 태어나길 원(願)해야 할 것이니 거기에 가면 그와 같이 으뜸가는 사람들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그마한 선근(善根)이나 공덕(功德)으로는 그 곳에 태어 날수 없느니라.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이 아미타불(阿彌陀佛)에 대한 말을 듣고 하루나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일랫동안 일심불난(一心不亂)하게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명호(名號)을 외우면 그가 임종할 때에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여러 성중(聖衆)과 함께 그 사람 앞에 나타날 것이니 목숨을 마칠때엔 생각이 뒤바끼지 않고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극락국토(極樂國土)에 태어날길 원해야 할 것이다.> (아미타경 = 阿彌陀經)
오역죄(五逆罪)와 십악업(十惡業)과 온갖 나쁜 짓을 저질러 지옥(地獄)에 떨어져 오랜 고통을 받을 체하(最下)의 하품하생자(下品下者)도 . . . . 임종시(臨終時)에 지성으로 간절하게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열번만 불러도 이 공덕(功德)으로 한 번 부를 때 마다 팔십억겁(八十億劫)의 생사중죄(生死重罪)가 소멸되며 임종시(臨終時)에 해바퀴 같은 황금(黃金) 연꽃이 그 앞에 나타나 순식간에 극락세계(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하게 된다. (관무량수경 = 觀無量壽經)등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죄를 짓고 사는 중생(衆生)에겐 차방정토설(此方淨土說) 보다 이 극락왕생(極樂淨土)의 타방정토설(他方淨土說)이 더 친근한 것은 어쩔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차방정토(此方淨土)를 구하던 타방정토(他方淨土)를 구하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뻔한 것이다. 즉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대로 부처님이 행(行)한 것, 도(道)를 따라서 배우고 닦아 실천수행하는 것이다. 우리의 몸이 불도(佛道)를 실천하고 임이 불법(佛法)을 믿고 우리의 마음이 불심(佛心)으로 돌아갈 때엔 정토(淨土)는 바로 그 곳에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무슨 걱정을 하리요. 그리고 법장(法藏) 비구(比丘)가 사십팔원(四十八願)을 성취(成就)하여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세웠다면 우리는 또한 그와 같은 원(願)을 세워 그와 같이 수행(修行)하고 성취(成就)하여 또 하나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세울 원(願)을 가질 수는 없을까? 불자(佛子)로서의 사명을 다시금 되새겨 보자. 그리고 이에 하나 더 덧 붙인다면 무량수경(無量壽經)엔 <아난(阿難)아, 중배자(中輩者)란 그 불국토(佛國土)에 태어나고자 하는 사람이 출가(出家)하여 선근공덕(善根功德)을 닦지 못하더라도 위 없는 보리심(菩提心)을 내어 일심(一心)으로 무량수불(無量壽佛)을 생각하고 착한 일도 하며 재계(齋戒)도 지키며 탑(塔)과 불상(佛像)을 조성(造成)하고 사문(沙門)에게 공경(恭敬)하며 향화(香華)를 올리며 이 공덕(功德)을 회향(廻向)하여 저 국토(國土)에 태어나길 원(願)하는 이들이다.> 하여 불탑(佛塔)숭배가 아니라 불상(佛像) 숭배를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불상(佛像)의 출현(出現)이 서력기원 후의 일이니 적어도 이 극락정토(極樂淨土) 경전(經典)의 성립(成立)은 그 후가되지 않을까 보고 있다. (2세기 중반 으로 주장) 따라서 정토계(淨土系) 경전(經典) 중예서 내용의 구체화로 보나 붕상(佛像) 숭배의 사상(思想)으로 보나 이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설(說)한 경전(經典)이 비교적 늦게 결집된 것으로 여겨진다.
오역죄(五逆罪)와 십악업(十惡業)과 온갖 나쁜 짓을 저질러 지옥(地獄)에 떨어져 오랜 고통을 받을 체하(最下)의 하품하생자(下品下者)도 . . . . 임종시(臨終時)에 지성으로 간절하게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열번만 불러도 이 공덕(功德)으로 한 번 부를 때 마다 팔십억겁(八十億劫)의 생사중죄(生死重罪)가 소멸되며 임종시(臨終時)에 해바퀴 같은 황금(黃金) 연꽃이 그 앞에 나타나 순식간에 극락세계(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하게 된다. (관무량수경 = 觀無量壽經)등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죄를 짓고 사는 중생(衆生)에겐 차방정토설(此方淨土說) 보다 이 극락왕생(極樂淨土)의 타방정토설(他方淨土說)이 더 친근한 것은 어쩔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차방정토(此方淨土)를 구하던 타방정토(他方淨土)를 구하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뻔한 것이다. 즉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대로 부처님이 행(行)한 것, 도(道)를 따라서 배우고 닦아 실천수행하는 것이다. 우리의 몸이 불도(佛道)를 실천하고 임이 불법(佛法)을 믿고 우리의 마음이 불심(佛心)으로 돌아갈 때엔 정토(淨土)는 바로 그 곳에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무슨 걱정을 하리요. 그리고 법장(法藏) 비구(比丘)가 사십팔원(四十八願)을 성취(成就)하여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세웠다면 우리는 또한 그와 같은 원(願)을 세워 그와 같이 수행(修行)하고 성취(成就)하여 또 하나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세울 원(願)을 가질 수는 없을까? 불자(佛子)로서의 사명을 다시금 되새겨 보자. 그리고 이에 하나 더 덧 붙인다면 무량수경(無量壽經)엔 <아난(阿難)아, 중배자(中輩者)란 그 불국토(佛國土)에 태어나고자 하는 사람이 출가(出家)하여 선근공덕(善根功德)을 닦지 못하더라도 위 없는 보리심(菩提心)을 내어 일심(一心)으로 무량수불(無量壽佛)을 생각하고 착한 일도 하며 재계(齋戒)도 지키며 탑(塔)과 불상(佛像)을 조성(造成)하고 사문(沙門)에게 공경(恭敬)하며 향화(香華)를 올리며 이 공덕(功德)을 회향(廻向)하여 저 국토(國土)에 태어나길 원(願)하는 이들이다.> 하여 불탑(佛塔)숭배가 아니라 불상(佛像) 숭배를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불상(佛像)의 출현(出現)이 서력기원 후의 일이니 적어도 이 극락정토(極樂淨土) 경전(經典)의 성립(成立)은 그 후가되지 않을까 보고 있다. (2세기 중반 으로 주장) 따라서 정토계(淨土系) 경전(經典) 중예서 내용의 구체화로 보나 붕상(佛像) 숭배의 사상(思想)으로 보나 이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설(說)한 경전(經典)이 비교적 늦게 결집된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