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설(眞如說)
구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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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7 19:44
6. 진여설(眞如說)
이러한 중도(中道)의 내용은 사실 말로 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추상적 명칭을 사용하여 여(如) 또는 진여(眞如) 등으로 부르니 일체(一切) 만법(萬法)이 중도(中道)를 떠난 것이 없다면 진여(眞如)도 결코 둘일 수가 없는 것이다. 공(空)으로 존재(存在)하는 그 모든 만법(萬法)의 본체를 진여(眞如)라는 말로 표시한다면 그 진여(眞如)는 변(變)할 수도 둘일 수도 없는 것이요 어떤 것에 의하여 생길수도 없어질수도 없는 것이어야 하며 깨끗해지거나 더러워지는 것도 아니라야만 그 어느 곳에나 언제나 진리(眞理)일 수 있지,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어느 특정한것 어느 특정한 때에만 국한대는 것이라면 결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만법에 두루하는 보편타당한 진리(眞理)라고는 할 수 없다. 대반야경(大般若經) 권 569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진여(眞如)를 이름하여 무이(無異), 무변(無變), 무생(無生), 무쟁(無諍)이라 하니 자성(自性)이 진실하여 다툼이 없기 때문이다. 제법(諸法)이 불생(不生)함을 여실히 알고 보니 제법(諸法)은 비록 날지라도 진여(眞如)는 동(動)하지 않으며 진여(眞如)는 비록 제법(諸法)을 낼지라도 진여(眞如)는 나지 않나니 이것을 법신(法身)이라 이름하느니라.> 그렇다면 즉 진여(眞如)는 제법(諸法)에 다름이 없고 제법(諸法)의 남(생 = 生)에 따라 동(動)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면에서 볼 땐 부처도 중생도 오로지 한 가지 진여(眞如)로서 같아야 할 것이니 진여(眞如)의 그 자리에선 부처도 중생도 같아야 할 것이다. 이제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잘 새겨보자. <이 모든 법(法)을 여의고는 진여(眞如)가 없느니라. 이 모든 법(法)의 여(如)는 여래(如來)의 여(如)이니 모두 일여(一如)라 무이무별(無二無別)이니라. 선남자(善男子)야 이와 같이 이것은 유일(唯一) 무이(無二) 무삼(無三)한 것으로서 모든 수(數)를 떠나 소유(所有)가 없느니라.> (반야바라밀경(般若波羅蜜弳) 권 28) <법성(法性)의 진여(眞如)와 유정(有情)의 진여(眞如)는 무이무별(無二無別)이요 유정(有情)의 진여(眞如)와 제법(諸法)의 진여(眞如)도 무이무별(無二無別)이요, 제법(諸法)의 진여(眞如)와 제불(諸佛)의 진여(眞如)도 무이무별(無二無別)이며 법성(法性)의 진여(眞如)와 삼세(三世)의 진여(眞如)는 서로 어긋나지 않고 과거(過去)의 진여(眞如)와 미래(未來)의 진여(眞如)도, 미래(未來)의 진여(眞如)와 현재(現在)의 진여(眞如)도, 현재(現在)의 진여(眞如)와 과거(過去)의 진여(眞如)도 서로 어긋나지 않으며 삼세(三世)의 진여(眞如)는 곧 온(縕). 처(處). 계(界)의 진여(眞如)요 온(蘊). 처(處). 계(界)의 진여(眞如)는 곧 생사(生死) 열반(涅槃)의 진여(眞如)요 생사(生死) 열반(涅槃)의 진여(眞如)는 곧 법(法)의 진여(眞如)이니라.> 대품반야(大品般若) 권 569) 즉 이 말은 진여(眞如)는 그 어느 것에 무이무별(無二無別)하여 한결같다는 이미이다 중생(衆生)도 부처도 그 진여(眞如)는 같고 과거법(過去法)도 현재법(現在法)도 그 진여(眞如)는 같다. 그러면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삼승(三乘)도 진여(眞如)의 면으론 같아야 하니 소품반야(小品般若) 권 6에는 <성문승(聲聞乘), 벽지불승(辟支佛乘), 보살승(菩薩乘) 이와 같은 삼승(三乘)은 여(如) 중에 차별이 없다.>고 하여 이 것을 확언(確言)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이 곧 있는 그대로의 삼승(三乘)이 같다는 이미는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무차별의 진여(眞如)를 체득하여 진여(眞如)와 합일(合一)된 존재(尊在)로서 살아가고자 할 때 중생(衆生)으로서의 탈은 점차 벗겨지는 것이며 성불(成佛)의 길은 열리는 것이다. 어쨌던 우리는 지혜(智慧 = 반야(般若), 공(空), 즁도(中道)인 진여(眞如)가 결코 다른 뿌리에서 난 것이 아님을 철저히 파악하고 체득하여 관념적인 이해가 아닌 나와 둘이 아닌 상태에서 묘용(妙用)하도록 끝 없이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중도(中道)의 내용은 사실 말로 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추상적 명칭을 사용하여 여(如) 또는 진여(眞如) 등으로 부르니 일체(一切) 만법(萬法)이 중도(中道)를 떠난 것이 없다면 진여(眞如)도 결코 둘일 수가 없는 것이다. 공(空)으로 존재(存在)하는 그 모든 만법(萬法)의 본체를 진여(眞如)라는 말로 표시한다면 그 진여(眞如)는 변(變)할 수도 둘일 수도 없는 것이요 어떤 것에 의하여 생길수도 없어질수도 없는 것이어야 하며 깨끗해지거나 더러워지는 것도 아니라야만 그 어느 곳에나 언제나 진리(眞理)일 수 있지,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어느 특정한것 어느 특정한 때에만 국한대는 것이라면 결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만법에 두루하는 보편타당한 진리(眞理)라고는 할 수 없다. 대반야경(大般若經) 권 569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진여(眞如)를 이름하여 무이(無異), 무변(無變), 무생(無生), 무쟁(無諍)이라 하니 자성(自性)이 진실하여 다툼이 없기 때문이다. 제법(諸法)이 불생(不生)함을 여실히 알고 보니 제법(諸法)은 비록 날지라도 진여(眞如)는 동(動)하지 않으며 진여(眞如)는 비록 제법(諸法)을 낼지라도 진여(眞如)는 나지 않나니 이것을 법신(法身)이라 이름하느니라.> 그렇다면 즉 진여(眞如)는 제법(諸法)에 다름이 없고 제법(諸法)의 남(생 = 生)에 따라 동(動)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면에서 볼 땐 부처도 중생도 오로지 한 가지 진여(眞如)로서 같아야 할 것이니 진여(眞如)의 그 자리에선 부처도 중생도 같아야 할 것이다. 이제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잘 새겨보자. <이 모든 법(法)을 여의고는 진여(眞如)가 없느니라. 이 모든 법(法)의 여(如)는 여래(如來)의 여(如)이니 모두 일여(一如)라 무이무별(無二無別)이니라. 선남자(善男子)야 이와 같이 이것은 유일(唯一) 무이(無二) 무삼(無三)한 것으로서 모든 수(數)를 떠나 소유(所有)가 없느니라.> (반야바라밀경(般若波羅蜜弳) 권 28) <법성(法性)의 진여(眞如)와 유정(有情)의 진여(眞如)는 무이무별(無二無別)이요 유정(有情)의 진여(眞如)와 제법(諸法)의 진여(眞如)도 무이무별(無二無別)이요, 제법(諸法)의 진여(眞如)와 제불(諸佛)의 진여(眞如)도 무이무별(無二無別)이며 법성(法性)의 진여(眞如)와 삼세(三世)의 진여(眞如)는 서로 어긋나지 않고 과거(過去)의 진여(眞如)와 미래(未來)의 진여(眞如)도, 미래(未來)의 진여(眞如)와 현재(現在)의 진여(眞如)도, 현재(現在)의 진여(眞如)와 과거(過去)의 진여(眞如)도 서로 어긋나지 않으며 삼세(三世)의 진여(眞如)는 곧 온(縕). 처(處). 계(界)의 진여(眞如)요 온(蘊). 처(處). 계(界)의 진여(眞如)는 곧 생사(生死) 열반(涅槃)의 진여(眞如)요 생사(生死) 열반(涅槃)의 진여(眞如)는 곧 법(法)의 진여(眞如)이니라.> 대품반야(大品般若) 권 569) 즉 이 말은 진여(眞如)는 그 어느 것에 무이무별(無二無別)하여 한결같다는 이미이다 중생(衆生)도 부처도 그 진여(眞如)는 같고 과거법(過去法)도 현재법(現在法)도 그 진여(眞如)는 같다. 그러면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삼승(三乘)도 진여(眞如)의 면으론 같아야 하니 소품반야(小品般若) 권 6에는 <성문승(聲聞乘), 벽지불승(辟支佛乘), 보살승(菩薩乘) 이와 같은 삼승(三乘)은 여(如) 중에 차별이 없다.>고 하여 이 것을 확언(確言)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이 곧 있는 그대로의 삼승(三乘)이 같다는 이미는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무차별의 진여(眞如)를 체득하여 진여(眞如)와 합일(合一)된 존재(尊在)로서 살아가고자 할 때 중생(衆生)으로서의 탈은 점차 벗겨지는 것이며 성불(成佛)의 길은 열리는 것이다. 어쨌던 우리는 지혜(智慧 = 반야(般若), 공(空), 즁도(中道)인 진여(眞如)가 결코 다른 뿌리에서 난 것이 아님을 철저히 파악하고 체득하여 관념적인 이해가 아닌 나와 둘이 아닌 상태에서 묘용(妙用)하도록 끝 없이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