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증
구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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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4 10:44
二. 이리증(二理證 = 이치에 의한 두가지 증명)
1.인식론적인 면으로 보아 식(識)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경(境)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객관적(客觀的) 대상이 없으면 따라서 주관적(主觀的) 인식도 일어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직 현재(現在)의 경(境)만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과거사(過去事)도 추억하고 미래사(未來事)도 능히 헤아려 생각하는 등 인식작용(認識作用)을 하니 이것은 과거법(過去法)도 또 미래법(未來法)도 있다는 말이 된다. 만일 과거법(過去法)도 없고 미래법(未來法)도 없다면 우리에겐 추억 하거나 헤아러 생각하는 등의 인식작용(認識作用)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과거(過去)의 법(法)도 미래(未來)의 법(法)도 그것은 실유(實有)하는 것이다.
2. 윤리적(倫理的)인 면으로 보아 과거(過去)의 인(因)에는 반드시 그에 따흐는 미래(未來)의 과(果)가 있기 마련이어서 과거(果去)의 선악업(善惡業)은 반드시 그에 따른 과보(果報)를 가져온다. 현재(現在)의 과보(果報)는 과거(過去)의 업(業)의 인(因)이요, 현재(現在)의 업(業)이 있다면 반드시 미래(未來)의 과보(果報)가 있기 마련이니 만일 과거법(過去法)이 없다면 현재(現在)의 과보(果報)는 과거(過去)의 선악업(善惡業)의 인(因)이 없이 생긴 것이 되어 이것은 인과법(因果法)에 맞지 않고 또 만일 미래법(未來法)이 없다면 현재(現在)의 선악업(善惡業)은 미래(未來)의 과보(果報)를 낳을 인(因)이 안 되는 것이니 이것도 인과법(因果法)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과거(過去)의 법(法)도 미래(未來)의 법(法)도 실유(實有)하는 것이다. 이상의 이경증(二經證) 이리증(二理證)은 모두 삼세실유(三世實有) 법체항유(法體恒有)를 논증(論證)하려 한 것이지만 이렇게 법체(法體)가 항유불변(恒有不滅)한다면 법체(法體)가 항유불멸(恒有不滅)하므로 과거(過去)니 현재(現在)니 하는 구분이 없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이런 삼세(三世)의 구분이 생기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연(因緣)의 집산(集散)으로 인하여 생멸변화(生滅変化)되는 가상적(假相的) 유위법(有爲法)으로써 구분이 있는 것이요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유위법(有爲法)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자세한 내용은 어떤한가 구사론(俱舍論) 권 20과 대비파사론(大毘婆沙論) 권 77에 소개되어 있는 사대론사(四大論師)의 상이(相異)한 학설(學說)을 인용하여 위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으니 이제 이것을 간략히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1. 법미(法敉)의 류부동설(類不同說)
법미(法敉)의 설(說)로는 법체(法體)는 동일하지만 류(類 = 상대)의 부동(不同)에 의하여 삼세(三世)를 구별 한다고 한다. 즉 법(法)이 미래(未來)로 부터 현재(現在)에 이를 땐 미래(未來)의 류(類)를 버리고 현재(現在)의 류(類)를 얻고, 현재(現在)로 부터 과거(過去)에 이를 땐 현재의 류(類)를 버리고 과거(過去)의 류(類)를 얻어, 법(法)은 그 류(類)만을 버리고 얻을 뿐 그 법체(法體)는 버리고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유(譬喩)하면 금(金)으로 만든 어떤 그릇을 녹여 다른 형태의 물건을 만들었을 경우 금(金)이라는 실체(實體)는 변함이 없어 그 형태만 바뀌는 것 같다고 하였다.
2. 묘음(妙音)의 상부동설(相不同說)
묘음(妙音)과 법체(法體)는 동일(同一)하지만 그 상(相 = 모양)은 부동(不同)으로 인하여 삼세(三世)를 구별한다고 한다. 즉 과거(過去)의 법(法)은 바로 과거(過去)의 상(相)과 합하되 현재(現在)와 미래(未來)의 상(相)을 버리는 것은 아니며, 미래(未來)의 법(法)은 바로 미래(未來)의 상(相)과 합학되 과거(過去)와 현재(現在)의 상(相)을 여의는 것이 아니며 또 현재(現在)의 법(法)은 바로 현재(現在)의 상(相)과 합하되 과거(過去)와 미래(未來)의 상(相)을 여의지 않는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상(相)이 나타날땐 나머지 이상(二相)은 나타나지 않음으로 다만 그 상(相)이 나타난 것에 따라 삼세(三世)의 구별을 하는 것 뿐이다.
1.인식론적인 면으로 보아 식(識)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경(境)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객관적(客觀的) 대상이 없으면 따라서 주관적(主觀的) 인식도 일어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직 현재(現在)의 경(境)만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과거사(過去事)도 추억하고 미래사(未來事)도 능히 헤아려 생각하는 등 인식작용(認識作用)을 하니 이것은 과거법(過去法)도 또 미래법(未來法)도 있다는 말이 된다. 만일 과거법(過去法)도 없고 미래법(未來法)도 없다면 우리에겐 추억 하거나 헤아러 생각하는 등의 인식작용(認識作用)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과거(過去)의 법(法)도 미래(未來)의 법(法)도 그것은 실유(實有)하는 것이다.
2. 윤리적(倫理的)인 면으로 보아 과거(過去)의 인(因)에는 반드시 그에 따흐는 미래(未來)의 과(果)가 있기 마련이어서 과거(果去)의 선악업(善惡業)은 반드시 그에 따른 과보(果報)를 가져온다. 현재(現在)의 과보(果報)는 과거(過去)의 업(業)의 인(因)이요, 현재(現在)의 업(業)이 있다면 반드시 미래(未來)의 과보(果報)가 있기 마련이니 만일 과거법(過去法)이 없다면 현재(現在)의 과보(果報)는 과거(過去)의 선악업(善惡業)의 인(因)이 없이 생긴 것이 되어 이것은 인과법(因果法)에 맞지 않고 또 만일 미래법(未來法)이 없다면 현재(現在)의 선악업(善惡業)은 미래(未來)의 과보(果報)를 낳을 인(因)이 안 되는 것이니 이것도 인과법(因果法)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과거(過去)의 법(法)도 미래(未來)의 법(法)도 실유(實有)하는 것이다. 이상의 이경증(二經證) 이리증(二理證)은 모두 삼세실유(三世實有) 법체항유(法體恒有)를 논증(論證)하려 한 것이지만 이렇게 법체(法體)가 항유불변(恒有不滅)한다면 법체(法體)가 항유불멸(恒有不滅)하므로 과거(過去)니 현재(現在)니 하는 구분이 없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이런 삼세(三世)의 구분이 생기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연(因緣)의 집산(集散)으로 인하여 생멸변화(生滅変化)되는 가상적(假相的) 유위법(有爲法)으로써 구분이 있는 것이요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유위법(有爲法)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자세한 내용은 어떤한가 구사론(俱舍論) 권 20과 대비파사론(大毘婆沙論) 권 77에 소개되어 있는 사대론사(四大論師)의 상이(相異)한 학설(學說)을 인용하여 위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으니 이제 이것을 간략히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1. 법미(法敉)의 류부동설(類不同說)
법미(法敉)의 설(說)로는 법체(法體)는 동일하지만 류(類 = 상대)의 부동(不同)에 의하여 삼세(三世)를 구별 한다고 한다. 즉 법(法)이 미래(未來)로 부터 현재(現在)에 이를 땐 미래(未來)의 류(類)를 버리고 현재(現在)의 류(類)를 얻고, 현재(現在)로 부터 과거(過去)에 이를 땐 현재의 류(類)를 버리고 과거(過去)의 류(類)를 얻어, 법(法)은 그 류(類)만을 버리고 얻을 뿐 그 법체(法體)는 버리고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유(譬喩)하면 금(金)으로 만든 어떤 그릇을 녹여 다른 형태의 물건을 만들었을 경우 금(金)이라는 실체(實體)는 변함이 없어 그 형태만 바뀌는 것 같다고 하였다.
2. 묘음(妙音)의 상부동설(相不同說)
묘음(妙音)과 법체(法體)는 동일(同一)하지만 그 상(相 = 모양)은 부동(不同)으로 인하여 삼세(三世)를 구별한다고 한다. 즉 과거(過去)의 법(法)은 바로 과거(過去)의 상(相)과 합하되 현재(現在)와 미래(未來)의 상(相)을 버리는 것은 아니며, 미래(未來)의 법(法)은 바로 미래(未來)의 상(相)과 합학되 과거(過去)와 현재(現在)의 상(相)을 여의는 것이 아니며 또 현재(現在)의 법(法)은 바로 현재(現在)의 상(相)과 합하되 과거(過去)와 미래(未來)의 상(相)을 여의지 않는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상(相)이 나타날땐 나머지 이상(二相)은 나타나지 않음으로 다만 그 상(相)이 나타난 것에 따라 삼세(三世)의 구별을 하는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