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법
구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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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1 11:07
제5항(第五項) 만법(萬法)은 유식소변(唯識所變)
이상으로써 우리는 우주만법(宇宙萬法)이 다 우리들 각자의 아뢰야식(阿賴耶識)으로 부터 전변(轉變)된 것이란 것을 알았다. 다시 말하면 정보(正報)의 세계(世界)와 의보(依報)의 세계(世界)가 다 각자(各者)의 심식(心識)으로 부터 전개(展開)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보(正報)의 세계(世界)라 하는 것은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수라(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불(佛)의 십계유정(十界有情)을 말하는 것이요, 의보(依報)의 세계(世界)라 하는 것은 십계유정(十界有情)이 의주(依住)할 처소(處所)로서의 세계(世界) 즉 산하대지(山河大地)같은 국토적(國土的) 존재(存在)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옥세계(地獄世界)의 의정이보(依正二報)는 지옥중생 (地獄衆生)의 자심(自心)으로 부터 전변(轉變)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가령 어떤 한 중생(衆生)이 <어떤> 생(生)을 받고 <어떤> 경계에 태어났다 하는 것은 곧 그 자심(自心)으로 부터 <어떤> 생(生)과 경계(境界)를 자신(自身)이 전계(展界)하였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스스로 악(惡)의 종자(種子)를 심어 지옥(地獄)에 태어난 중생(衆生)에 있어서는 모든 삼라만상(森羅萬象) 우주전체(宇宙全體)가 모두 고구(苦具)로써 가득차 있어서 다른 9계(九界)를 볼 수 없는 것이요 이와 같이 다른 9계(九界)의 유정(有情)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와 같아서 모든 중생(衆生)은 자신(自身)의 생(生)과 경계(境界)를 그 스스로 전개(展開)하는 것이다. 인간(人間)도 불(佛)도 결국은 그것을 전개할 아뢰야식(阿賴耶識)중의 종자(種子)로 부터 전개되는 것이라 불(佛)이 되고저 할진대는 그 종자(種子)를 불(佛)이 될 무루(無漏)의 종자(種子)로 완전히 바꿔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종자(種子)를 훈습(熏習)하는 7식(七識)의 행(行)이 무루(無漏)의 것이 안 되면 결코 불(佛)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선 그것을 위한 강력(強力)한 실천수행(實踐修行)이 요구되는 것이며 생각이나 이념만 가지고는 될 수가 결코 없는것이다. 즉 어떤 한 종자(種子)를 심느냐가 그 생(生)과 경계(境界)를 판가름할 뿐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더 추가하여 본다면 십계(十界)의 생(生)과 경계(境界)는 그렇다 하더라도 그러면 같은 인간(人間)이라 하여도 제각기 다른 모습에 다른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하는 점이다. 이것에 대해선 공상종자(共相種子) 불공상종자(不共相種子)가 있다고 하여 이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즉 인간(人間)이라면 인간(人間), 축생(畜生)이라면 축생(畜生)이라는 중생(衆生)이 서로 비슷하게 산하대지(山河大地) 등의 객관세계(客觀世界)를 수용(受用)하니 이것은 어떤 부류(部類)의 중생(衆生)끼리 서로 비슷한 종자(種子) 즉 공상종자(共相種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요 그 유정(有情)들이 주관적(主觀的)으로 각기 생사(生死)가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고 하는 것 등은 각기 서로 다른 종자(種子) 즉 불공상종자(不共相 種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볼 때 우리가 어떤 생(生)을 받느냐 하는 것도 또 그 생(生)을 받은 중에서도 또한 어떤 생활을 꾸려나가느냐 하는 것도 또 그 생(生)을 받은 중에서도 또한 어떤 생활을 꾸려나가느냐 하는 것도 결국은 다 우리 스스로 심은 종자(種子)가 어떠냐 하는 것에 달렸다. 설사 지난 생(生)에 인간(人間)으로 태어날 종자(種子)밖에 못 심어 인간(人間)에 태어나 고생을 하고 있더라도 더 이상 인간(人間) 수생(受生)을 할 종자(種子)를 심지 않고 천상(天上)에 태어날 종자(種子)를 심어 간다면 신훈(新熏) 전에 심은 인간(人間) 수생(受生)의 본유종자(本有種子)의 세력(勢力)이 다 하면 천상(天上) 수생(受生)의 신훈종자(新熏種子)만이 남아 인간(人間)으로서의 목숨은 자연히 다하는 동시(同時)에 천상(天上)에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現在) 이 세상(世上)을 살아감에 고통으로 여기고 살아가거나 즐거움으로 여기고 살아가거나 다 자기(自己)가 지은 것이라 누구를 탓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어떤 정해진 운명(運命)이나 숙명(宿命) 등으로 생각하여 체념상태에 머물러도 안 되니 우리에겐 항상 본유종자(本有 種子)는 그 세력(勢力)이 소멸되어 감과 동시(同時)에 신훈종자(新熏種子)가 계속 심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아뢰야식연기설(阿賴耶識緣起說)로 미루어볼 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각자(各者)의 현실(現實)을 냉철하게 바로 보고 그 현실을 발판으로 하여 보다 나은 미래(未來)를 꾸준히 살려 나가는 것이라야 하겠다. 우리의 행위에 의해 종자(種子)는 심어지고 그 종자(種子)는 다시 그에 따른 과보(果報)와 행위를 낳으면서 서로 인과관계(因果關係)를 되풀이 하고 있다고 하기 때문이니 말이다
이상으로써 우리는 우주만법(宇宙萬法)이 다 우리들 각자의 아뢰야식(阿賴耶識)으로 부터 전변(轉變)된 것이란 것을 알았다. 다시 말하면 정보(正報)의 세계(世界)와 의보(依報)의 세계(世界)가 다 각자(各者)의 심식(心識)으로 부터 전개(展開)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보(正報)의 세계(世界)라 하는 것은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수라(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불(佛)의 십계유정(十界有情)을 말하는 것이요, 의보(依報)의 세계(世界)라 하는 것은 십계유정(十界有情)이 의주(依住)할 처소(處所)로서의 세계(世界) 즉 산하대지(山河大地)같은 국토적(國土的) 존재(存在)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옥세계(地獄世界)의 의정이보(依正二報)는 지옥중생 (地獄衆生)의 자심(自心)으로 부터 전변(轉變)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가령 어떤 한 중생(衆生)이 <어떤> 생(生)을 받고 <어떤> 경계에 태어났다 하는 것은 곧 그 자심(自心)으로 부터 <어떤> 생(生)과 경계(境界)를 자신(自身)이 전계(展界)하였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스스로 악(惡)의 종자(種子)를 심어 지옥(地獄)에 태어난 중생(衆生)에 있어서는 모든 삼라만상(森羅萬象) 우주전체(宇宙全體)가 모두 고구(苦具)로써 가득차 있어서 다른 9계(九界)를 볼 수 없는 것이요 이와 같이 다른 9계(九界)의 유정(有情)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와 같아서 모든 중생(衆生)은 자신(自身)의 생(生)과 경계(境界)를 그 스스로 전개(展開)하는 것이다. 인간(人間)도 불(佛)도 결국은 그것을 전개할 아뢰야식(阿賴耶識)중의 종자(種子)로 부터 전개되는 것이라 불(佛)이 되고저 할진대는 그 종자(種子)를 불(佛)이 될 무루(無漏)의 종자(種子)로 완전히 바꿔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종자(種子)를 훈습(熏習)하는 7식(七識)의 행(行)이 무루(無漏)의 것이 안 되면 결코 불(佛)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선 그것을 위한 강력(強力)한 실천수행(實踐修行)이 요구되는 것이며 생각이나 이념만 가지고는 될 수가 결코 없는것이다. 즉 어떤 한 종자(種子)를 심느냐가 그 생(生)과 경계(境界)를 판가름할 뿐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더 추가하여 본다면 십계(十界)의 생(生)과 경계(境界)는 그렇다 하더라도 그러면 같은 인간(人間)이라 하여도 제각기 다른 모습에 다른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하는 점이다. 이것에 대해선 공상종자(共相種子) 불공상종자(不共相種子)가 있다고 하여 이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즉 인간(人間)이라면 인간(人間), 축생(畜生)이라면 축생(畜生)이라는 중생(衆生)이 서로 비슷하게 산하대지(山河大地) 등의 객관세계(客觀世界)를 수용(受用)하니 이것은 어떤 부류(部類)의 중생(衆生)끼리 서로 비슷한 종자(種子) 즉 공상종자(共相種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요 그 유정(有情)들이 주관적(主觀的)으로 각기 생사(生死)가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고 하는 것 등은 각기 서로 다른 종자(種子) 즉 불공상종자(不共相 種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볼 때 우리가 어떤 생(生)을 받느냐 하는 것도 또 그 생(生)을 받은 중에서도 또한 어떤 생활을 꾸려나가느냐 하는 것도 또 그 생(生)을 받은 중에서도 또한 어떤 생활을 꾸려나가느냐 하는 것도 결국은 다 우리 스스로 심은 종자(種子)가 어떠냐 하는 것에 달렸다. 설사 지난 생(生)에 인간(人間)으로 태어날 종자(種子)밖에 못 심어 인간(人間)에 태어나 고생을 하고 있더라도 더 이상 인간(人間) 수생(受生)을 할 종자(種子)를 심지 않고 천상(天上)에 태어날 종자(種子)를 심어 간다면 신훈(新熏) 전에 심은 인간(人間) 수생(受生)의 본유종자(本有種子)의 세력(勢力)이 다 하면 천상(天上) 수생(受生)의 신훈종자(新熏種子)만이 남아 인간(人間)으로서의 목숨은 자연히 다하는 동시(同時)에 천상(天上)에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現在) 이 세상(世上)을 살아감에 고통으로 여기고 살아가거나 즐거움으로 여기고 살아가거나 다 자기(自己)가 지은 것이라 누구를 탓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어떤 정해진 운명(運命)이나 숙명(宿命) 등으로 생각하여 체념상태에 머물러도 안 되니 우리에겐 항상 본유종자(本有 種子)는 그 세력(勢力)이 소멸되어 감과 동시(同時)에 신훈종자(新熏種子)가 계속 심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아뢰야식연기설(阿賴耶識緣起說)로 미루어볼 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각자(各者)의 현실(現實)을 냉철하게 바로 보고 그 현실을 발판으로 하여 보다 나은 미래(未來)를 꾸준히 살려 나가는 것이라야 하겠다. 우리의 행위에 의해 종자(種子)는 심어지고 그 종자(種子)는 다시 그에 따른 과보(果報)와 행위를 낳으면서 서로 인과관계(因果關係)를 되풀이 하고 있다고 하기 때문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