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자소훈처
구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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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7 09:35
2. 종자소훈처(種子所熏處)의 의의(意義)
위와 같은 종자(種子)가 저장되는 곳은 이미 말한 것과 같이 제8식(第八識)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이다. 그리고 여기서 훈(熏)이란 곧 훈습(熏習)을 말하는 것으로 훈습(熏習)이란 곧 우리의 신(身) 구(口) 의(意)의 모든 행동이 일어나는 그대로 없어지지 아니하고 반드시 어떤 세력을 아뢰야식(阿賴耶識)중에 머물러 두게 하는 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마치 향이 옷에 배어듬과 같아 향을 치워도 그 향내는 계속 나는 것과 같기에 비유해서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7전식(七轉識)이 제8식(第八識)에 종자(種子)를 발생하고 신훈종자(新熏種子)를 증장케 하는 것은 훈습(熏習)이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훈습(熏習)이란 말을 8식(八識)에 쓰게 되면 8식(八識) 중 7전식(七轉識)은 능히 종자(種子)를 습훈(熏習)하는 식(識)이 되므로 능훈(能熏)이 되는 것이요 제8식(第八識) 즉 아뢰야식(阿賴耶識)은 종자(種子)가 훈습(熏習)되는 곳이므로 소훈(所熏)이 되는것이다. 그러므로 종자(種子)를 함장(含藏)하는 아뢰야식(阿賴耶識)도 종자(種子)를 훈습(熏習)하는 7전식(七轉識)도 각기 다 어떤 특성을 갖추고 있으니 이것이 소훈처(所熏處)인 아뢰야식(阿賴耶識)에서 부터 알아보면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의(四義)가 있다고 한다. 사의(四義)란
ㄱ. 견주성(堅住性) : 종자(種子)의 훈습(熏習)을 받을 식(識)은 무시이래(無始以來)로 부터 보살(菩薩)의 구경의(究竟位)에 이르기까지 일류(一類 = 견(堅)로 상속(相續 = 주(住)하여 단절(斷絶)함이 없어야 한다. 만일 이것에 간단(間斷)이 있다면 아뢰야식(阿賴耶識)이 간단(間斷)될 때엔 종자(種子)가 훈습(熏習)될 곳도 저장될 곳도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고정불변(固定不變)의 것이 되어서도 안 된다. 만일 고정불변(固定不變)의 것이라면 또한 제법(諸法)의 훈습(熏習)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비유하여 항전여폭류(恒轉如暴流)라고 한다. 여기서 항(恒)이란 말은 상속(相續)하여 간단(間斷)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전(轉)이란 말은 생멸전변(生滅轉變)하여 고정상주(固定常住)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뢰야식(阿賴耶識)은 부단불상(不斷不常)하는 성질의 것이란 뜻이다.
ㄴ. 무기성(無記性) : 다음엔 무기성(無記性)이라야 된다는 것이다. 만일 제8식(第八識)이 선(善)이나 악(惡) 어느 한 쪽의 성질만을 가지고 있다면 그 반대되는 종자(種子)를 훈습(熏習)하지 못한다. 만일 선성(善性)이면 악종자(惡種子)의 훈습(熏習)을 받아드라지 않을 것이요 만일 악성(惡性)이면 선종자(善種子)의 훈습(熏習)을 받아드리지 않을 것이다. 또 유루성(有漏性)이면 무루종자(無漏種子)의 훈습(熏習)을 받아드리지 않을 것이요. 무루성(無漏性)이면 유루종자(有漏種子)의 훈습(熏習)을 받아드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만일 이렇다면 오로지 결정적으로 무루성(無漏性)이 된 불(佛)이 유루종자(有漏種子)의 훈습(熏習)을 받아들여 다시 범부로 타락한다는 것은 결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아뢰야식(阿賴耶識)에 어떤 종자(種子)를 함장(含藏) 시키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함장(含藏)된 종자(種子)에 따라 악인(惡人)은 언제까지나 더욱 악인(惡人)이요 선인(善人)은 언제까지나 더욱 선인(善人)이요 범부(凡夫)는 언제까지나 범부(凡夫)일 뿐이라. 악인(惡人)이 선인(善人)되고 범부(凡夫)가 불(佛)이 되는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선(善) 악(惡) 유루(有漏) 무루(無漏)의 모든 종자(種子)의 훈습(熏習)을 받아들이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은 그 성(性)이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은 무기성(無記性)이라아 한다는 것이다. 한번 지어서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잠재된 종자(種子)는 콩 심으면 콩이나고 팥심으면 팥이 나는 거와 같른 것이다.
위와 같은 종자(種子)가 저장되는 곳은 이미 말한 것과 같이 제8식(第八識)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이다. 그리고 여기서 훈(熏)이란 곧 훈습(熏習)을 말하는 것으로 훈습(熏習)이란 곧 우리의 신(身) 구(口) 의(意)의 모든 행동이 일어나는 그대로 없어지지 아니하고 반드시 어떤 세력을 아뢰야식(阿賴耶識)중에 머물러 두게 하는 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마치 향이 옷에 배어듬과 같아 향을 치워도 그 향내는 계속 나는 것과 같기에 비유해서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7전식(七轉識)이 제8식(第八識)에 종자(種子)를 발생하고 신훈종자(新熏種子)를 증장케 하는 것은 훈습(熏習)이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훈습(熏習)이란 말을 8식(八識)에 쓰게 되면 8식(八識) 중 7전식(七轉識)은 능히 종자(種子)를 습훈(熏習)하는 식(識)이 되므로 능훈(能熏)이 되는 것이요 제8식(第八識) 즉 아뢰야식(阿賴耶識)은 종자(種子)가 훈습(熏習)되는 곳이므로 소훈(所熏)이 되는것이다. 그러므로 종자(種子)를 함장(含藏)하는 아뢰야식(阿賴耶識)도 종자(種子)를 훈습(熏習)하는 7전식(七轉識)도 각기 다 어떤 특성을 갖추고 있으니 이것이 소훈처(所熏處)인 아뢰야식(阿賴耶識)에서 부터 알아보면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의(四義)가 있다고 한다. 사의(四義)란
ㄱ. 견주성(堅住性) : 종자(種子)의 훈습(熏習)을 받을 식(識)은 무시이래(無始以來)로 부터 보살(菩薩)의 구경의(究竟位)에 이르기까지 일류(一類 = 견(堅)로 상속(相續 = 주(住)하여 단절(斷絶)함이 없어야 한다. 만일 이것에 간단(間斷)이 있다면 아뢰야식(阿賴耶識)이 간단(間斷)될 때엔 종자(種子)가 훈습(熏習)될 곳도 저장될 곳도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고정불변(固定不變)의 것이 되어서도 안 된다. 만일 고정불변(固定不變)의 것이라면 또한 제법(諸法)의 훈습(熏習)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비유하여 항전여폭류(恒轉如暴流)라고 한다. 여기서 항(恒)이란 말은 상속(相續)하여 간단(間斷)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전(轉)이란 말은 생멸전변(生滅轉變)하여 고정상주(固定常住)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뢰야식(阿賴耶識)은 부단불상(不斷不常)하는 성질의 것이란 뜻이다.
ㄴ. 무기성(無記性) : 다음엔 무기성(無記性)이라야 된다는 것이다. 만일 제8식(第八識)이 선(善)이나 악(惡) 어느 한 쪽의 성질만을 가지고 있다면 그 반대되는 종자(種子)를 훈습(熏習)하지 못한다. 만일 선성(善性)이면 악종자(惡種子)의 훈습(熏習)을 받아드라지 않을 것이요 만일 악성(惡性)이면 선종자(善種子)의 훈습(熏習)을 받아드리지 않을 것이다. 또 유루성(有漏性)이면 무루종자(無漏種子)의 훈습(熏習)을 받아드리지 않을 것이요. 무루성(無漏性)이면 유루종자(有漏種子)의 훈습(熏習)을 받아드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만일 이렇다면 오로지 결정적으로 무루성(無漏性)이 된 불(佛)이 유루종자(有漏種子)의 훈습(熏習)을 받아들여 다시 범부로 타락한다는 것은 결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아뢰야식(阿賴耶識)에 어떤 종자(種子)를 함장(含藏) 시키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함장(含藏)된 종자(種子)에 따라 악인(惡人)은 언제까지나 더욱 악인(惡人)이요 선인(善人)은 언제까지나 더욱 선인(善人)이요 범부(凡夫)는 언제까지나 범부(凡夫)일 뿐이라. 악인(惡人)이 선인(善人)되고 범부(凡夫)가 불(佛)이 되는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선(善) 악(惡) 유루(有漏) 무루(無漏)의 모든 종자(種子)의 훈습(熏習)을 받아들이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은 그 성(性)이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은 무기성(無記性)이라아 한다는 것이다. 한번 지어서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잠재된 종자(種子)는 콩 심으면 콩이나고 팥심으면 팥이 나는 거와 같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