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혹(迷惑)의 행위
구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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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3 09:48
ㅁ. 미혹(迷惑)의 행위
우리 인간의 심리 상태에 의하여 고락(苦樂)의 경험은 크게 변화하여 간다. 변화하는 이유를 살펴보고 사람의 심리 상태를 조사해 보면, 필경엔 마음에 의지하는 것이요, 번뇌(煩惱)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마음의 본질적인 의욕에 의하여 갖가지 망상이 일어나고 그 망동(妄動)에 의해서 온갖 인생 경험이 나타나게 됨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혹업고(惑業苦)인데, 불교의 인연설(因緣說)은 이것을 토대로 성립된 것이다. 이 혹업고(惑業苦)에 대하여 잠깐 설명하기로 하자.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들의 마음이나 생명의 본질은 한 마디로 말해서 애욕(愛慾)이다. 이것을 불교의 술어로 갈애(渴愛)라고 하는데 가장 근본적인 욕망이다. 이것을 유애(有愛)라고 한다. 이 유애가 움직여서 외계(外界)에 대하여 여러 가지 욕망으로 나타난다. 이 욕망을 실현(實現)에 옮기면, 그것을 업(業), 즉 행위라고 부르게 된다. 이 업이 움직이는 것을 신업(身業), 구업(口業), 의업(意業)으로 나누는데, 그 어떤 업이 발동할 때라도 그 것은 그 사람의 성격상(性格上)의 작용으로 나타난다. 예컨데 어떤 색채의 값진 물건을 보왔을 적에 가지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 욕망은 우리 인간의 생존욕의 하나로서 나타나는 것이며, 마음에 드는 상대를 보면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의지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소유한 사람에 대해서는 질투로 바뀌고 만다. 이것을 의업(意業)이라고 하는데, 이 의지(意志)가 입(구 = 口)이거나 몸(신 = 身)의 기관을 통해 표면에 나타나면 구업(口業)과 신업(身業)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런데 이 신(身), 구(口), 의(意)의 삼업(三業)은 어떤 것이 발동하든지 한번 움직인 이상 그 흔적이 얼른 소멸되지 않는다.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자기의 마음 속에 그림자를 남기고 가기 때문이다. 어떤 좋지 못한 일을 할 때에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다른 사람이 알고 내가 알고 있어서 꺼림직하게 여기는 것은 그 행위가 결코 소멸되지 않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하늘도 알지 못하고 땅도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은 모를 지라도 나는 알고 있으니 이러한 행위가 반드시 사람의 성격상에 음영(陰影)을 주는 것이다. 이 음영을 불교에서 무표업(無表業)이라고 한다. 모든 인간은 출생할 때에 가지고 온 본연(本然)의 성격 위에 이 무표업(無表業)이라는 색채가 가(加)해져 있는 것이다. 이 무표업은 우리가 죽은 뒤라도 무수히 첨가(添可)되게 마련이기 때문에 인생은 자기가 지은 업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음영이 쌓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의 업(業)에 의하여 자기의 성격을 만들고, 그 성격은 그에 상응하는 고락(苦樂)을 가져오게 마련이다. 예를 들면 나쁜일을 하였다든가, 살인을 하였다든가 하는 업에 의하여 혹종(或種)의 강박 관념을 갖게 되는 것과 같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아무것도 아닌 사건에 대해서 공포감을 느끼고 강박감으로 고통을 받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우리들의 고락 경험은 우리들 스스로의 업(業)에 의한 것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이것이 곧 혹업고(惑業苦)에 대한 인연설(因緣說)이다. 이것에 대해서 다짐하여 둘 것은, 같은 업(業) 중에서도 부처님께서는 특히 의업(意業)을 중요시 했다는 것이다. 죽이려고 생각하였서도 미처 죽이지 못한 것은 법률상으로는 죄가 되지 않지만 우리의 성격상에는 비장한 영향을 일으킨다. 그러나 죽이겠다는 의지는 전혀 없었지만 어찌다 과실로 죽게한 것은 법률상으로는 죄가 되지만 성격상으로는 전기와 같은 공포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계속)
우리 인간의 심리 상태에 의하여 고락(苦樂)의 경험은 크게 변화하여 간다. 변화하는 이유를 살펴보고 사람의 심리 상태를 조사해 보면, 필경엔 마음에 의지하는 것이요, 번뇌(煩惱)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마음의 본질적인 의욕에 의하여 갖가지 망상이 일어나고 그 망동(妄動)에 의해서 온갖 인생 경험이 나타나게 됨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혹업고(惑業苦)인데, 불교의 인연설(因緣說)은 이것을 토대로 성립된 것이다. 이 혹업고(惑業苦)에 대하여 잠깐 설명하기로 하자.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들의 마음이나 생명의 본질은 한 마디로 말해서 애욕(愛慾)이다. 이것을 불교의 술어로 갈애(渴愛)라고 하는데 가장 근본적인 욕망이다. 이것을 유애(有愛)라고 한다. 이 유애가 움직여서 외계(外界)에 대하여 여러 가지 욕망으로 나타난다. 이 욕망을 실현(實現)에 옮기면, 그것을 업(業), 즉 행위라고 부르게 된다. 이 업이 움직이는 것을 신업(身業), 구업(口業), 의업(意業)으로 나누는데, 그 어떤 업이 발동할 때라도 그 것은 그 사람의 성격상(性格上)의 작용으로 나타난다. 예컨데 어떤 색채의 값진 물건을 보왔을 적에 가지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 욕망은 우리 인간의 생존욕의 하나로서 나타나는 것이며, 마음에 드는 상대를 보면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의지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소유한 사람에 대해서는 질투로 바뀌고 만다. 이것을 의업(意業)이라고 하는데, 이 의지(意志)가 입(구 = 口)이거나 몸(신 = 身)의 기관을 통해 표면에 나타나면 구업(口業)과 신업(身業)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런데 이 신(身), 구(口), 의(意)의 삼업(三業)은 어떤 것이 발동하든지 한번 움직인 이상 그 흔적이 얼른 소멸되지 않는다.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자기의 마음 속에 그림자를 남기고 가기 때문이다. 어떤 좋지 못한 일을 할 때에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다른 사람이 알고 내가 알고 있어서 꺼림직하게 여기는 것은 그 행위가 결코 소멸되지 않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하늘도 알지 못하고 땅도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은 모를 지라도 나는 알고 있으니 이러한 행위가 반드시 사람의 성격상에 음영(陰影)을 주는 것이다. 이 음영을 불교에서 무표업(無表業)이라고 한다. 모든 인간은 출생할 때에 가지고 온 본연(本然)의 성격 위에 이 무표업(無表業)이라는 색채가 가(加)해져 있는 것이다. 이 무표업은 우리가 죽은 뒤라도 무수히 첨가(添可)되게 마련이기 때문에 인생은 자기가 지은 업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음영이 쌓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의 업(業)에 의하여 자기의 성격을 만들고, 그 성격은 그에 상응하는 고락(苦樂)을 가져오게 마련이다. 예를 들면 나쁜일을 하였다든가, 살인을 하였다든가 하는 업에 의하여 혹종(或種)의 강박 관념을 갖게 되는 것과 같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아무것도 아닌 사건에 대해서 공포감을 느끼고 강박감으로 고통을 받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우리들의 고락 경험은 우리들 스스로의 업(業)에 의한 것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이것이 곧 혹업고(惑業苦)에 대한 인연설(因緣說)이다. 이것에 대해서 다짐하여 둘 것은, 같은 업(業) 중에서도 부처님께서는 특히 의업(意業)을 중요시 했다는 것이다. 죽이려고 생각하였서도 미처 죽이지 못한 것은 법률상으로는 죄가 되지 않지만 우리의 성격상에는 비장한 영향을 일으킨다. 그러나 죽이겠다는 의지는 전혀 없었지만 어찌다 과실로 죽게한 것은 법률상으로는 죄가 되지만 성격상으로는 전기와 같은 공포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