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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구경사 0 224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생(人生)의 의의가 무엇이고. 사람이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객관적으로 이 인생을 한번 관찰하여 보도록 하자. 이 근본적인 인생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이 있는가.? 오직 불법(佛法)이라야 능히 해답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세상에 탄생할 때 고고성(高高聲)을 지르며 방바닥에 떨어진다. 이 출생의 시점부터 죽는 시간까지를 살아가는 과정을 인생(人生)이라고 한다. 그럼 "인생은 어디로부터 왔다가 어디로 향하는가?,, 하고 묻는 다면 과연 선뜻 대답할 사람이 누구겠는가? 다만 까닭도 없이  왔다가 까닭도 없이 간다던지 저절로 왔다가 저절로 간다고 말할 수밖에 없으니, 이 와중에서 인생은 저절로 결성 해 지고 당초 어떤 계획에서 연유 되는지도 모르고 부부가 맺어져서 함께 흘러가게 되며 인생 사업을 모두 어름어름 해 가고 있을 뿐 적어도 자기의 주의대로 성취(成就)된 것이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느 서양 철학자가 망망한 인생에 비유해서 한 얘기를 들어보자. 어느 곳에 산 둘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산은 몹시 험준할 뿐 아니라 산과 산 사이에는 까마득한 벼랑과 벼랑 밑을 흐르는 깊은 냇물이 흐르고 있어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냇물을 건너는 길이라고는 두 산을 연결한 길고 가는 외나무 다리가 하나 걸려 있을 뿐이다. 이 다리를 밟지 않고서는 사람들은 저쪽 산을 밟을 수 없게 되므로 할 수 없이 이 길을 택한다. 그런데 다리에 걸음을 옮겨 딛고서 앞을 보면 안개가 가득 끼어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고 뒤를 돌아다 보면 뒷산은 구름에 가리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아래를 굽어보면 발아래는 천야만야 벼랑이요, 벼랑 밑에는 시퍼런 냇물이 낼름낼름 굽이쳐 흐른다. 그래도 사람들은 다리를 건너야 하기 때문에 걸음을 전진한다. 그런데 서너 걸음이나 걷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사람, 한 반이나 나가다가 떨어지는 사람, 심지어는 거의 저쪽 편에 이르는 즈음해서 떨어지는 사람, 그리고 떨어지기만 하면 행적이 묘연하게 된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 인생에 비유한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불교에서는 인생에 대해서 어디로부터 오고 어디로 가며, 현재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를 분명히 설명하고 있으니 마치 한 조가 작은 배를 타고 망망한 대해를 방향도 없이 항해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항로를 잘 찾아서 멀고 험한 바다를 무사히 항해하여 목적하는 바 저쪽 언덕에 다다르게 하는 방법으로 안내하는 것이 불교인 것이다. 인생은 바쁘다. 젊어서 부터 늙어 죽는 날까지 무언지 모르게 항상 바쁘기만 하다. 바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항상 바쁘기만 하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바빠야 하느야 하면 아무도 대답할 말이 없다. 다만, "바쁘지 않을 수가 없다.,, 라고 말할 뿐이다. 청년들은 인생을 깊이 생각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인생은 무한하고 만리 창공에 그들의 전도를 환영하는 광명한 웃음의 여신이 항상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의 힘과 기백이면 무엇 하나 거침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년이 넘어가면 녹록한 인생에 대하여 초조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인생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하고 긴장을 가지기도 한다. 나는 여러분에게 바쁘지 말라는 것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바빠서 얻어지는 결과가 무엇이냐를 찾아보라는 것이다. 백락천의 시에 이런 것이 있다.
사람들이란 흡사 꽃따라 다니는 벌과 같아서
아침 저녁 동서로 날아다니며 바쁘다 마는
백 가지 꽃을 따다가 꿀을 만들어 놓았댔자
결국은 신고한 것이 한마당 허사로다.
하고 읊었다. 사람들이 불철 주야 바쁜 결과 어느 시점에서 자기가 얻고자 한 자유나 권력이나 재산을 얻었다 하자 그러나 얼마가 지나는 동안 그것은 다시 잃어버리게 된다  모두가 헛 좋아한 것이다. 결국 아무것도 성취한 것이 없는 것이다. 나아가 많은 사람들은 이 점에 대해서 이런 저런 체험과 심각한 경험을 통한 논리가 있다. 그들은 바쁜 결과 얻어지는 것과 또 얻어진 것의 잃어지는 것에 대한 실망, 허무, 비관을 통하여 소극적인 관념을 자아내게 된다. 그러나 불법을 배우느 일만은 모든 것이 헛된 일이 되지 않게 된다. 우리는 하루 바삐 불법을 배우는 일에 힘 기울임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람들에게 악행(惡行)을 버리고 선(善)한 일을 하라고 권하는 것은 불교뿐 아니고 그리스도교, 유교, 마하멧교 등 어디서나 주장하는 일이다. 그러나 선행을 하면 무엇이 이롭다는 것인가? 인과율에서는 사람이 선을 행하면 선의 결과가 오고, 악을 행하면 악한 대가를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유교에서는 선을 행하는 목적이 대개 가정적인 데 있고 적선을 하면 경사가 있고 적악을하면 재앙리 있다고 하여 부모가 선를 많이 행하으로써 그 후손에게 복이 되어 자손이 번창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되는 것이 아니고 부모는 한량없이 선량한데 자손은 돌연히 악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악한 부모에 선하 자손이 나오기도  하는 등 정확한 공식이 없다. 제요는 착하였지마는 그의 아들인 단주는 폭인이였고, 고수는 행실이 간아가였으나 그의 아들인 무는 대효하여 그의 어버이나 형제들의 시중을 잘 들어 주었다. 요즘 흔히들 말하고 있느 좋지 못한 일만을 일삼고 있는 사람들이 재산과 권력을 얻어 잘 살아가고 있고, 착한 사람은 오히려 못 사는 사회이다 라는 말이 이런 류이다. 그러면 선악, 화복에 무슨 규율이 있어 반드시 람으로 하여금 선하라고만 하는 것일까. 이 문제는 필히 불교에서 말한 삼세인과(三世因果)라야 해결이 된다. 일체 종교가, 선을 권하는 그 출발점은 같지만 그 결론에 있어서는 뷸교를 따라올 수가 없다. 불교를 배우고 착한 일만을 부지런히 하면 현실적으로 당하는 여러가지 불만, 불행, 재앙이 모두 소멸되고 선과가 성취되어  자연히 행복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축축(逐逐)하는 마음에 대하여 언급코자 한다. 이것이야 말로 괴로운 일이다. 우리들의 마음은 모두 밖으로 달아나서 해매고 있다. 색에, 재물에, 명리에, 해매고 있다. 왜 이러느냐 하면 마음에 만족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부단히 낮은 데서 높은 데로 향하여 움직인다. 우선 의식에 곤란을 느끼는 사람은 의식 문제 해결에 집요한다. 그러나 의식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거처를 잘 꾸미고 싶어 한다. 거처 문제가 마음먹은 대로 해결이 되면 충족한 가정, 그리고 좋은 아내와 훌륭한 자식을 낳아 기르고 싶어한다. 이런 것까지가 모두 충족이 됐을 때에는 지위가 높아지고 싶어한다. 지위가 다시 높아지면 더 높은 차원으로 권력을 누리고 싶어한다. 이런 단계로서 커지는 마음의 욕심은 그 한계가 없어, 드디어는 도저히 다 채울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고마는 것인데 아렇다한들 염라대왕이 부를 때 그 명을 무엇으로 거역할 수가 있겠는가! 사람이 욕망을 쫒는 현상이란 말이 질주하는 것과 같다. 뒷발굽이 앞발굽을 쫒아 잡을려고 하면 벌써 앞발굽은 땅을 차고 공중을 난다. 그러므로 달리는 말의 네발굽은 땅에 있을 시간이 없다. "안락하면 족하다,,고 하였건만 사람릐 마음은 족할 경우가 없으니 무엇으로 이 마음을 채워줄 수 있을까? 이 경우에 불교만이 이것을 해결하고 채워줄 수가 있게 된다. 불교는 먼저 사람으로 하여근 생사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풀게 하여준다. 그것만 해결되면 인생을 녹록하여 그 소득이 무엇인가, 선을 행하면 그 이득이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안락과 만족을 얻을 수 있는가하느뉸제에 해답을 구하게 된다. 불교의 핵심이란 이런 문제를 파악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때 ㅣ로소 참다운 만족과 안락을 얻을 수 있으니 불교가 아니고서는 이런 문제 해결에 접근할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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