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홍서원(四弘誓願)
구경사
0
339
2023.04.30 19:33
사홍서원(四弘誓願)
이제 우리는 돌아가 의지할 곳이 생겼다. 그러면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스스로 마음의 굳은 약속을 한 자가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가 삼귀의(三歸依)를 미래의 성불(成佛)을 향한 굳은 약속을 한 자가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가 삼귀의을 미래의 성불을 향한 굳은 약속이라 한다면 이 사홍서원(四弘誓願)은 그 실쳔 수행면에서 성불의 길을 안내해 주는 객관적인 이정표(里程表)요 목적지(目的地)로 나아가는 것이라 하겠다. 사홍서원이란? 곧 모든 부처님께서 수행(修行)할 때의 총원(總願) 으로
중생무변서원도
衆生無邊誓願度)
중생이 갓이 없지만 맹세코
다 건지기를 원합니다.
번뇌무진서원단
煩惱無盡誓願斷
번뇌가 다함이 없지만 맹세코
다 끊기를 원합니다.
법문무량서원학
法門無量誓願學
문법이 한량이 없지만 맹세코
다 배우기를 원합니다.
불도무상서원성
佛道無上誓願成
불도가 위 없서도 맹세코 다
이루기를 원합니다.
고 하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겸비한 네가지의 큰 맹세와 꼭 하고자 하는 바 원(願)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온 중생이 바라는 바요 온 중생에게 차별없는 이익을 안겨주고. 온 중생이 성불(成佛)을 위해서는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럴까. 이제 우리는 현실을 돌이켜 보며 이에 대한 답을 내려 보기로 하자. 중생이란? 축생까지도 목숨 있는 모든 준동함령(蠢動含靈)까지도 다 포함한 의혹과 번뇌에 가득찬 모든 생명있는 자를 말한다.그들은 왜 태어났으며 어떻게 살 것인지 또 어디로 갈 것인지도 모름과 순간 순간을 자기 탐욕의 만족과 불만 속에서 웃고 울면서 열리고 닫히는 생사(生死)의 파도 위에 뜬 나무조각 처럼 육도(六道)를 끝 없이 방황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들은 저 행복(幸福)과 영원(永遠)의 푸른 화원(花園), 열반(涅槃)의 언덕으로 가는 길을 모른다. 우리는 중생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또한 단 하루의 편한 날도 없이 이 걱정 저 걱정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돌이켜 보면 모든 생명있는 자들이 그렇듯이 우리 자신 어느 누가 더 이상 이런 고통, 이런 번뇌의 그물을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어느 의미에서든지 이러한 고해를 여의고 열반의 꽃동산으로 가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말해 우리는 이런 육도(六道)의 고해(苦海)를 떠나야만 되고 또 떠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이라 자리적(自利的)인 서원(誓願)을 세우지 않을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만 이 모든 번뇌를 다 끊고 열반(涅槃)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여기에는 어떠한 중생이라도 반드시 그 곳에 이르도록 펼쳐진 그리고 결코 그들로 하여금 허둥대게 만드거나 그릇 인도할 염려가 없는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길이 제시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번뇌의 연속체인 중생으로서는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줄 수 없다. 그것은 단지 모든 번뇌를 끊은 자. 열반을 증득한 자. 그리하여 복(福). 혜(慧)를 구족하고 자비심(慈悲心)을 일으킨 자만이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하나도 빠짐없이 다 열반에 이르도록 하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이제 우리는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길을 따라 가기만 하면 된다. 이것을 우리는 불도(佛道)을 배운다고 한다. 우리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바를 법문이라 함은? 이것을 따름이 곧 진리(眞理)의 전당(殿堂), 열반(涅槃)의 화원(花園)에 이르는 문(門)에 들어섬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생각이나 이해만 가지고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요. 실제 그 문을 들어서고 그 곳에 이르여야만 하는 것이기에 철저한 수행을 그 조건으로한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 번뇌를 다 끊고 열반에 이르고자 할진대는 피나는 정진(精進)의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이란 결의를 다져 첫걸음을 내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리하여 우리가 번뇌를 꾾고 법문을 배우고 하여 열반에 이른다 하여도 아직 문제는 남아 있다. 즉 그것은 나 혼자만이 그렇게 하면 되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재론의 여지도 없이 "아니다,,라는 대답 밖에 할 수 없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한 채 중생의 은혜 속에서 갖가지 인연(因緣)으로 얽혀 살고 있다. 부모가 없다면 내 어이 태어나고 생장(生長)하였으며 스승이 없다면 내 어찌 배우겠으며 농부가 없다면 내 어찌 밥을 먹겠으며 나라가 없다면 내 어찌 편히 잠을 잘 것인가. 또한 부모가 자식을 모르고 백성이 나라를 모른다면 또한 어찌 도리라 하겠는가. 이와 같음에 우리는 모든 중생의 은혜에 보답하여야만 하며 또한 모든 중생도 나와 같이 이고득락(離苦得樂)하기를 원함에 모두 다 정도(正道)를 가도록 해야만 한다. 이것은 성불 전(成佛 前)이건 후(後)이건 중생이 남아있는 한은 계속되어야만 하고 또 이루어져야만 할 대업(大業)인 것이다. 만일 이것을 외면한다면 설사 번뇌를 끊었다. 하더라도 성불은 아직도 먼 것이며 반데로 각자가 모두 <중생을 제도하리라> 할 때 우리 모두 성불의 길은 그만큼 가까워지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의 이타행(利他行)을 대 전재로 내세우지 아나하랴. 그리하여 안으로는 번뇌를 다 끊고 법문을 다 배우며 밖으로는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하여 나감으로서 불도(佛道)를 꼭 성취(成就)하여야 할지니 우리는 끝으로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이란 원(願)을 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힘찬 전진의 발걸음을 내딛어 보자 무상(無上)의 불법(佛法) 앞에 두려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제 우리는 돌아가 의지할 곳이 생겼다. 그러면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스스로 마음의 굳은 약속을 한 자가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가 삼귀의(三歸依)를 미래의 성불(成佛)을 향한 굳은 약속을 한 자가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가 삼귀의을 미래의 성불을 향한 굳은 약속이라 한다면 이 사홍서원(四弘誓願)은 그 실쳔 수행면에서 성불의 길을 안내해 주는 객관적인 이정표(里程表)요 목적지(目的地)로 나아가는 것이라 하겠다. 사홍서원이란? 곧 모든 부처님께서 수행(修行)할 때의 총원(總願) 으로
중생무변서원도
衆生無邊誓願度)
중생이 갓이 없지만 맹세코
다 건지기를 원합니다.
번뇌무진서원단
煩惱無盡誓願斷
번뇌가 다함이 없지만 맹세코
다 끊기를 원합니다.
법문무량서원학
法門無量誓願學
문법이 한량이 없지만 맹세코
다 배우기를 원합니다.
불도무상서원성
佛道無上誓願成
불도가 위 없서도 맹세코 다
이루기를 원합니다.
고 하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겸비한 네가지의 큰 맹세와 꼭 하고자 하는 바 원(願)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온 중생이 바라는 바요 온 중생에게 차별없는 이익을 안겨주고. 온 중생이 성불(成佛)을 위해서는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럴까. 이제 우리는 현실을 돌이켜 보며 이에 대한 답을 내려 보기로 하자. 중생이란? 축생까지도 목숨 있는 모든 준동함령(蠢動含靈)까지도 다 포함한 의혹과 번뇌에 가득찬 모든 생명있는 자를 말한다.그들은 왜 태어났으며 어떻게 살 것인지 또 어디로 갈 것인지도 모름과 순간 순간을 자기 탐욕의 만족과 불만 속에서 웃고 울면서 열리고 닫히는 생사(生死)의 파도 위에 뜬 나무조각 처럼 육도(六道)를 끝 없이 방황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들은 저 행복(幸福)과 영원(永遠)의 푸른 화원(花園), 열반(涅槃)의 언덕으로 가는 길을 모른다. 우리는 중생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또한 단 하루의 편한 날도 없이 이 걱정 저 걱정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돌이켜 보면 모든 생명있는 자들이 그렇듯이 우리 자신 어느 누가 더 이상 이런 고통, 이런 번뇌의 그물을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어느 의미에서든지 이러한 고해를 여의고 열반의 꽃동산으로 가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말해 우리는 이런 육도(六道)의 고해(苦海)를 떠나야만 되고 또 떠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이라 자리적(自利的)인 서원(誓願)을 세우지 않을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만 이 모든 번뇌를 다 끊고 열반(涅槃)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여기에는 어떠한 중생이라도 반드시 그 곳에 이르도록 펼쳐진 그리고 결코 그들로 하여금 허둥대게 만드거나 그릇 인도할 염려가 없는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길이 제시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번뇌의 연속체인 중생으로서는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줄 수 없다. 그것은 단지 모든 번뇌를 끊은 자. 열반을 증득한 자. 그리하여 복(福). 혜(慧)를 구족하고 자비심(慈悲心)을 일으킨 자만이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하나도 빠짐없이 다 열반에 이르도록 하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이제 우리는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길을 따라 가기만 하면 된다. 이것을 우리는 불도(佛道)을 배운다고 한다. 우리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바를 법문이라 함은? 이것을 따름이 곧 진리(眞理)의 전당(殿堂), 열반(涅槃)의 화원(花園)에 이르는 문(門)에 들어섬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생각이나 이해만 가지고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요. 실제 그 문을 들어서고 그 곳에 이르여야만 하는 것이기에 철저한 수행을 그 조건으로한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 번뇌를 다 끊고 열반에 이르고자 할진대는 피나는 정진(精進)의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이란 결의를 다져 첫걸음을 내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리하여 우리가 번뇌를 꾾고 법문을 배우고 하여 열반에 이른다 하여도 아직 문제는 남아 있다. 즉 그것은 나 혼자만이 그렇게 하면 되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재론의 여지도 없이 "아니다,,라는 대답 밖에 할 수 없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한 채 중생의 은혜 속에서 갖가지 인연(因緣)으로 얽혀 살고 있다. 부모가 없다면 내 어이 태어나고 생장(生長)하였으며 스승이 없다면 내 어찌 배우겠으며 농부가 없다면 내 어찌 밥을 먹겠으며 나라가 없다면 내 어찌 편히 잠을 잘 것인가. 또한 부모가 자식을 모르고 백성이 나라를 모른다면 또한 어찌 도리라 하겠는가. 이와 같음에 우리는 모든 중생의 은혜에 보답하여야만 하며 또한 모든 중생도 나와 같이 이고득락(離苦得樂)하기를 원함에 모두 다 정도(正道)를 가도록 해야만 한다. 이것은 성불 전(成佛 前)이건 후(後)이건 중생이 남아있는 한은 계속되어야만 하고 또 이루어져야만 할 대업(大業)인 것이다. 만일 이것을 외면한다면 설사 번뇌를 끊었다. 하더라도 성불은 아직도 먼 것이며 반데로 각자가 모두 <중생을 제도하리라> 할 때 우리 모두 성불의 길은 그만큼 가까워지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의 이타행(利他行)을 대 전재로 내세우지 아나하랴. 그리하여 안으로는 번뇌를 다 끊고 법문을 다 배우며 밖으로는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하여 나감으로서 불도(佛道)를 꼭 성취(成就)하여야 할지니 우리는 끝으로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이란 원(願)을 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힘찬 전진의 발걸음을 내딛어 보자 무상(無上)의 불법(佛法) 앞에 두려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