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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홍서원(四弘誓願)

구경사 0 339
사홍서원(四弘誓願)
이제 우리는 돌아가 의지할 곳이 생겼다. 그러면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스스로 마음의 굳은 약속을 한 자가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가 삼귀의(三歸依)를 미래의 성불(成佛)을 향한 굳은 약속을 한 자가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가 삼귀의을 미래의 성불을 향한 굳은 약속이라 한다면 이 사홍서원(四弘誓願)은 그 실쳔 수행면에서 성불의 길을 안내해 주는 객관적인 이정표(里程表)요 목적지(目的地)로 나아가는 것이라 하겠다. 사홍서원이란?  곧 모든 부처님께서 수행(修行)할 때의 총원(總願) 으로

 중생무변서원도         
衆生無邊誓願度)
중생이 갓이 없지만 맹세코
다 건지기를  원합니다.

 번뇌무진서원단         
煩惱無盡誓願斷
번뇌가 다함이 없지만 맹세코
다 끊기를 원합니다.

 법문무량서원학
法門無量誓願學
문법이 한량이 없지만 맹세코
다 배우기를 원합니다.

불도무상서원성
佛道無上誓願成
불도가 위 없서도 맹세코 다
이루기를 원합니다.
고 하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겸비한 네가지의 큰 맹세와 꼭 하고자 하는 바 원(願)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온 중생이 바라는 바요 온 중생에게 차별없는 이익을 안겨주고. 온 중생이 성불(成佛)을 위해서는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럴까. 이제 우리는 현실을 돌이켜 보며 이에 대한 답을 내려 보기로 하자. 중생이란? 축생까지도 목숨 있는 모든 준동함령(蠢動含靈)까지도 다 포함한 의혹과 번뇌에 가득찬 모든 생명있는 자를 말한다.그들은 왜 태어났으며 어떻게 살 것인지 또 어디로 갈 것인지도 모름과 순간 순간을 자기 탐욕의  만족과 불만 속에서 웃고 울면서 열리고 닫히는 생사(生死)의 파도 위에 뜬 나무조각 처럼 육도(六道)를 끝 없이 방황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들은 저 행복(幸福)과 영원(永遠)의 푸른 화원(花園), 열반(涅槃)의 언덕으로 가는 길을 모른다. 우리는 중생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또한 단 하루의 편한 날도 없이 이 걱정 저 걱정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돌이켜 보면 모든 생명있는 자들이 그렇듯이 우리 자신 어느 누가 더 이상 이런 고통, 이런 번뇌의 그물을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어느 의미에서든지 이러한 고해를 여의고 열반의 꽃동산으로 가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말해  우리는 이런 육도(六道)의 고해(苦海)를 떠나야만 되고 또 떠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이라 자리적(自利的)인 서원(誓願)을 세우지 않을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만 이 모든 번뇌를 다 끊고 열반(涅槃)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여기에는 어떠한 중생이라도 반드시 그 곳에 이르도록 펼쳐진 그리고 결코 그들로 하여금 허둥대게 만드거나 그릇 인도할 염려가 없는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길이 제시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번뇌의 연속체인 중생으로서는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줄 수 없다. 그것은 단지 모든 번뇌를 끊은 자. 열반을 증득한 자. 그리하여 복(福). 혜(慧)를 구족하고 자비심(慈悲心)을 일으킨 자만이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하나도 빠짐없이 다 열반에 이르도록 하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이제 우리는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길을 따라 가기만 하면 된다. 이것을 우리는 불도(佛道)을 배운다고 한다. 우리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바를 법문이라 함은? 이것을 따름이 곧 진리(眞理)의 전당(殿堂), 열반(涅槃)의 화원(花園)에 이르는 문(門)에 들어섬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생각이나 이해만 가지고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요. 실제 그 문을 들어서고 그 곳에 이르여야만 하는 것이기에 철저한 수행을 그 조건으로한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 번뇌를 다 끊고 열반에 이르고자 할진대는 피나는 정진(精進)의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이란 결의를 다져 첫걸음을 내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리하여 우리가 번뇌를 꾾고 법문을 배우고 하여 열반에 이른다 하여도 아직 문제는 남아 있다. 즉 그것은 나 혼자만이 그렇게 하면 되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재론의 여지도 없이 "아니다,,라는 대답 밖에 할 수 없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한 채 중생의 은혜 속에서 갖가지 인연(因緣)으로 얽혀 살고 있다. 부모가 없다면 내 어이 태어나고 생장(生長)하였으며 스승이 없다면 내 어찌 배우겠으며 농부가 없다면 내 어찌 밥을 먹겠으며 나라가 없다면 내 어찌 편히 잠을 잘 것인가. 또한 부모가 자식을 모르고 백성이 나라를 모른다면 또한 어찌 도리라 하겠는가. 이와 같음에 우리는 모든 중생의 은혜에 보답하여야만 하며 또한 모든 중생도 나와 같이 이고득락(離苦得樂)하기를 원함에 모두 다 정도(正道)를 가도록 해야만 한다. 이것은 성불 전(成佛 前)이건 후(後)이건 중생이 남아있는 한은 계속되어야만 하고 또 이루어져야만 할 대업(大業)인 것이다. 만일 이것을 외면한다면 설사 번뇌를 끊었다. 하더라도 성불은 아직도 먼 것이며 반데로 각자가 모두 <중생을 제도하리라> 할 때 우리 모두 성불의 길은 그만큼 가까워지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의 이타행(利他行)을 대 전재로 내세우지 아나하랴. 그리하여 안으로는 번뇌를 다 끊고 법문을 다 배우며 밖으로는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하여 나감으로서 불도(佛道)를 꼭 성취(成就)하여야 할지니 우리는 끝으로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이란 원(願)을 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힘찬 전진의 발걸음을 내딛어 보자 무상(無上)의 불법(佛法) 앞에 두려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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