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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묵대사(眞默大師) 같은

구경사 0 341
진묵대사(眞默大師) 같은 스님은 곡차를 즐겨 드셨다. 진묵대사(眞默大師) 음주송(飮酒頌)에
천금지욕 산위침(天衾地褥 山爲枕)
월촉운병 해작준(月燭雲屛 海作樽)
내기무 대취거연(乃起舞 大醉居然)
각혐장유 괘곤륜(却嫌長䄂 掛崑崙)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요로 삼으며 산을 베개로 삼고.
달을 촛불 삼고 구름을 병풍삼아 바다물을 술통으로.
술을마시고 크게 취하여 일어나서 두둥실 춤을추니
옷소매가 곤륜산(崑崙山)에 걸릴까 두렵도다.
하는 유명한 무애경계(無礙境界)의 음주송(飮酒頌)을 남겨서 후세 중생들이 계율에 묶여 있는 병(病)을 고쳐 주고자 무애행의 거울이 되게 하셨다. 무애도인(無礙道人)이신 경허선사(鏡虛禪師)같은 분은 사찰에서 술을 마시고 고기를 구워 먹는 것을 사내대중(寺內大衆)들에게 보임으로서 계율에 묶여 꼼짝달싹 못하는 스님네를 건져 주고자 힘쓰시었다. 어느 선사는 전신에 똥을 칠하고 다니면서 청정한데에 묶여 있는 중생들을 건져 주고자 애쓰시었다. 어느 선사는 평생을 광인행(狂人行)으로 한산(寒山)과 습득(拾得) 같은 이들은 무애걸인행(無碍乞人行)으로서 중생들이 모든 것에 걸려 있는 병들을 고쳐주고자 무애행의 본보기로 행세하셨다. 그 밖에도 많은 선지식(善知識)들이 중생들의 얽매여 있는 모든 병을 고쳐 주고자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마음으로 갖은 애를 썻던 것을 생각할 때 그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이와 같이 모든 대성(大聖)들께서 중생들의 얽매여 있는 병들을 고쳐주고자 애를 쓰고 있는데 어찌 해서 무엇 때문에 아직까지 계율에 묶이고 부처에 묶여서 쩔쩔매고 있는지는 도저히 알 길이 없다. 능엄경(楞嚴經)에 묶여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능가경(楞伽經)의 방편설(方便說)에 묶여서 그런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설이니 부처님의 참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한 생각을 돌아켜서 부처가 되라고 했지 언제 모든 것에 걸려 있으라고 했는가. 무엇에나 걸려 있으면 이것은 묶여 있는 것이지 어찌 그것이 해탈일 수가 있겠는가. 아무 것에도 걸림이 없어야 무애요 해탈인 것이다. 여기에 또 무애경지의 시들을 게재하니 일쳬의 걸림을 풀고 해탈하기를 바란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향로봉시(香爐峰詩)
만국도성 여질의(萬國都城 如蛭蟻)
천가호걸 야해계(千家毫傑 若醢鷄)
무한송풍 운역재(無限松風 韻亦齋)
일창명월 청허침(一窓明月 淸虛枕)
일만 나라의 서울은 마치 개미들이 사는 곳과 같고.
천 집의 영웅호걸들은 마치 초벌레들이 우굴거리는 것과 같네
솔바람의 곡조 또한 멋지나니
창문에 비치는 밝은 달빛만 베개위에 맑도다.
 
소동파 연화대시(蘇東坡 蓮花台詩)에
계성자시 광장설(溪聲自是 廣長說)
산색기비 청정신(山色豈非 淸淨身)
야래팔만 사천게(夜來八萬 四千偈)
타일여하 거개인(他日如何 擧皆人)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곧 무정설법(無情說法)인데
푸른 산 빛은 어찌 청정(淸淨)한 법신(法身)이 아닐까 보냐.
밤의 팔만사천의  수 많은 시들을
다른 날 그 모두를 어떻게 이야기하리요. 
중생들이 불도(佛道)를 닦는 목적은 깨달음에 들어서 대자유자재(大自由自在)하여 이와 같은 무애경지(無礙境地)에 들고자 함이거늘 무엇에나 털끝만치라도 걸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런 목적의식도 없이 자신의 못된 습성을 합리화시키려고 무애행을 빙자해서 흡사 무애도인(無碍道人)인양 막행막식(莫行莫食)하는 일이 있으면 이것은 천불출세(千佛出世)라도 구제불능이니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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