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관(涅槃觀)
구경사
0
322
04.10 10:03
五. 열반관(涅槃觀)
1.대반열반(大般涅槃)의 뜻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은 부처님께서 쿠시나가라 의 사라 쌍수(雙樹) 밑에서 입멸(入滅)하시기 바로 전에 말씀하신 최후의 법문(法門)으로 1주야(一晝夜)에 설(說)하셨다고 한다. 그러면 우선 대반열반(大般涅槃)이란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열반(涅槃)이란 이미 삼법인(三法印) 중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을 설명하는 과정에서도 나왔지만 번뇌(煩惱)의 불꽃이 꺼져 없어진 것을 나타내는 멸(滅) 적(寂) 적멸(寂滅) 등으로 된 말이다. 다음 반(般)은 온전하다. 또는 원만하다는 뜻을 가진 말이기에 반열반(般涅槃)하면 온전한 열반(涅槃), 원만한 열반(涅槃)이 되어 흔히 웑ㅡ원적(圓寂)이라 번역(飜譯)한다. 그리고 대(大)는 크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대반열반(大般涅槃)하면 곧 대원적(大圓寂)으로 번역(飜譯)되어 뜻으로 본다면 <타오르는 번뇌(煩惱)가 하나도 남김없이 완전히 남김없이 소멸되어 버리고 그리고 다시 일어나지도 않는 상태> 즉 <고요하고 깨끗한 깨달음의 경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보통 반열반(般涅槃) 대반열반(大般涅槃)하면 부처님의 입멸(入滅)을 뜻하는 말이 되어 버렸으니 그것은 유여(有餘) 무여(無餘)의 이종(二種)의 열반관(涅槃觀)의 영향이 크다고 하겠지만. 보다 근복적인 것을 찾는다면 영원한 깨달음의 존재인 부처님께서 오 보통 사람과 같이 돌아가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에서 부처님의 입적(入寂)을 단순한 죽음으로 보지 않고 그를 통하여 단순한 죽음으로 보지 않고 그를 통하여 어떠한 영원성을 찾으려는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드것이다. 그러므로 소승(小乘)에서는 이것을 유여(有餘) 무여(無餘)의 두 가지 열반과(涅槃觀)을 새워 이것을 해결 할려고 노력 하였지만 대승(大乘)에선 이보다 더 나아가 모든 대립의 세계를 넘어서 그렇다고하여 상대의 반대가 되는 의미에서의 반대가 아닌 상대 그대로를 다 포용하는 절대적인 영원성을 찾으려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대승(大乘)의 관찰(觀察)이 결코 부처님의 말씀에 없던 것을 새로 만들어서 한 것은 아니니 대승의 그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좀 더 깊이 파고 들어가 그 뜻을 파악함으로써 이러한 길을 찾아 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부처님의 입멸(入滅)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계기로 부처님의 압멸(入滅)을 영원(永遠)한 입멸(入滅)이 아니라 방편(方便)의 몸인 생신(生身)만의 입멸(入滅)이요 법신(法身)은 생멸(生滅)을 떠나 상주불변(常住不變)하다고 하였던 것이며 열반(涅槃)도 색신(色身)만 없어졌지 법신(法身)은 상주(常住)해서 탄신멸지(炭身滅智)의 소극적인 열반(涅槃)이 아니라 영원불멸(永遠不滅)의 적극적인 열반(涅槃)을 찾아냈던 것이니 법신(法身)은 이러한 적극적인 열반(涅槃)과 둘이 아니기에 그 적극적인 묘용(妙用)을 펴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光明遍照高貴德王菩薩品)에는 열반(涅槃)과 대반열반(大般涅槃)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說)하고 있다. <불성(佛性)을 보지 못하고 번뇌(煩惱)만 꾾은 것을 열반(涅槃)이라 하고 대열반(大涅槃)이라 하지 않는다. 불성(佛性)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상(常) 아(我)는 없고 락(樂) 정(淨)만 있으니 이런 뜻으로 번뇌(煩惱)는 끊었으나 대열반(大涅槃)이라 하지 않느니라.> <번뇌(煩惱)를 끊은 것은 "열반(涅槃),,이라 하지 않고 번뇌(煩惱)가 생기지 않는 것을 열반(涅槃)이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초기의 원시경전(原始經典)상의 열반(涅槃)에 대한 단순한 해석보다는 본(本) 경(經)의 열반(涅槃)에 대한 해석이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띄고 있음을 알게 된다.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의 이승(二乘)은 삼계(三界)의 번뇌(煩惱)를 끊어 열반(涅槃)을 증득하곤 다시는 삼계(三界)에 돌아오지 않기에 중생교화(衆生敎化)의 면은 결여되어 있다. 하지만 부처님은 중생(衆生)을 불쌍히 보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대비심(大悲心)이 있기에 삼계(三界)에서 갖가지 방편(方便)을 써 시현(示現)하시니 그렇다고 하여 열반(涅槃)을 증득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그렇다면 과연 바람직한 열반(涅槃)은 어느 쪽이 되어야 할 것인가 그에 대한 해답은 명확하다. 그것은 중생이 남아 있는 한은 지혜(智慧)가 법(法)에 하등의 장애가 없어 <번뇌(煩惱)가 일어나지 않는다.> 부처님의 열반(涅槃)이라야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대반열반(大般涅槃)인 것이다. 다음과 같은 말씀은 이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부처님이 열반(涅槃)에 드시는 것은 나무가 다하여 불이 꺼지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것은 불요의(不了義)요 부처님이 법(法) 성품(性品)에 든다고 하면 그것은 요의(了義)인 것이다.이승(二乘)의 법(法)은 의지하지 말지니 부처님께서 중생(衆生)을 제도하시기 위하여 방편(方便)으로 이승(二乘)을 말쑴 하신 것이라 이것은 불요의(不了義) 이니라. (사의품 = 四衣品)
1.대반열반(大般涅槃)의 뜻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은 부처님께서 쿠시나가라 의 사라 쌍수(雙樹) 밑에서 입멸(入滅)하시기 바로 전에 말씀하신 최후의 법문(法門)으로 1주야(一晝夜)에 설(說)하셨다고 한다. 그러면 우선 대반열반(大般涅槃)이란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열반(涅槃)이란 이미 삼법인(三法印) 중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을 설명하는 과정에서도 나왔지만 번뇌(煩惱)의 불꽃이 꺼져 없어진 것을 나타내는 멸(滅) 적(寂) 적멸(寂滅) 등으로 된 말이다. 다음 반(般)은 온전하다. 또는 원만하다는 뜻을 가진 말이기에 반열반(般涅槃)하면 온전한 열반(涅槃), 원만한 열반(涅槃)이 되어 흔히 웑ㅡ원적(圓寂)이라 번역(飜譯)한다. 그리고 대(大)는 크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대반열반(大般涅槃)하면 곧 대원적(大圓寂)으로 번역(飜譯)되어 뜻으로 본다면 <타오르는 번뇌(煩惱)가 하나도 남김없이 완전히 남김없이 소멸되어 버리고 그리고 다시 일어나지도 않는 상태> 즉 <고요하고 깨끗한 깨달음의 경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보통 반열반(般涅槃) 대반열반(大般涅槃)하면 부처님의 입멸(入滅)을 뜻하는 말이 되어 버렸으니 그것은 유여(有餘) 무여(無餘)의 이종(二種)의 열반관(涅槃觀)의 영향이 크다고 하겠지만. 보다 근복적인 것을 찾는다면 영원한 깨달음의 존재인 부처님께서 오 보통 사람과 같이 돌아가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에서 부처님의 입적(入寂)을 단순한 죽음으로 보지 않고 그를 통하여 단순한 죽음으로 보지 않고 그를 통하여 어떠한 영원성을 찾으려는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드것이다. 그러므로 소승(小乘)에서는 이것을 유여(有餘) 무여(無餘)의 두 가지 열반과(涅槃觀)을 새워 이것을 해결 할려고 노력 하였지만 대승(大乘)에선 이보다 더 나아가 모든 대립의 세계를 넘어서 그렇다고하여 상대의 반대가 되는 의미에서의 반대가 아닌 상대 그대로를 다 포용하는 절대적인 영원성을 찾으려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대승(大乘)의 관찰(觀察)이 결코 부처님의 말씀에 없던 것을 새로 만들어서 한 것은 아니니 대승의 그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좀 더 깊이 파고 들어가 그 뜻을 파악함으로써 이러한 길을 찾아 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부처님의 입멸(入滅)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계기로 부처님의 압멸(入滅)을 영원(永遠)한 입멸(入滅)이 아니라 방편(方便)의 몸인 생신(生身)만의 입멸(入滅)이요 법신(法身)은 생멸(生滅)을 떠나 상주불변(常住不變)하다고 하였던 것이며 열반(涅槃)도 색신(色身)만 없어졌지 법신(法身)은 상주(常住)해서 탄신멸지(炭身滅智)의 소극적인 열반(涅槃)이 아니라 영원불멸(永遠不滅)의 적극적인 열반(涅槃)을 찾아냈던 것이니 법신(法身)은 이러한 적극적인 열반(涅槃)과 둘이 아니기에 그 적극적인 묘용(妙用)을 펴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光明遍照高貴德王菩薩品)에는 열반(涅槃)과 대반열반(大般涅槃)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說)하고 있다. <불성(佛性)을 보지 못하고 번뇌(煩惱)만 꾾은 것을 열반(涅槃)이라 하고 대열반(大涅槃)이라 하지 않는다. 불성(佛性)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상(常) 아(我)는 없고 락(樂) 정(淨)만 있으니 이런 뜻으로 번뇌(煩惱)는 끊었으나 대열반(大涅槃)이라 하지 않느니라.> <번뇌(煩惱)를 끊은 것은 "열반(涅槃),,이라 하지 않고 번뇌(煩惱)가 생기지 않는 것을 열반(涅槃)이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초기의 원시경전(原始經典)상의 열반(涅槃)에 대한 단순한 해석보다는 본(本) 경(經)의 열반(涅槃)에 대한 해석이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띄고 있음을 알게 된다.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의 이승(二乘)은 삼계(三界)의 번뇌(煩惱)를 끊어 열반(涅槃)을 증득하곤 다시는 삼계(三界)에 돌아오지 않기에 중생교화(衆生敎化)의 면은 결여되어 있다. 하지만 부처님은 중생(衆生)을 불쌍히 보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대비심(大悲心)이 있기에 삼계(三界)에서 갖가지 방편(方便)을 써 시현(示現)하시니 그렇다고 하여 열반(涅槃)을 증득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그렇다면 과연 바람직한 열반(涅槃)은 어느 쪽이 되어야 할 것인가 그에 대한 해답은 명확하다. 그것은 중생이 남아 있는 한은 지혜(智慧)가 법(法)에 하등의 장애가 없어 <번뇌(煩惱)가 일어나지 않는다.> 부처님의 열반(涅槃)이라야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대반열반(大般涅槃)인 것이다. 다음과 같은 말씀은 이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부처님이 열반(涅槃)에 드시는 것은 나무가 다하여 불이 꺼지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것은 불요의(不了義)요 부처님이 법(法) 성품(性品)에 든다고 하면 그것은 요의(了義)인 것이다.이승(二乘)의 법(法)은 의지하지 말지니 부처님께서 중생(衆生)을 제도하시기 위하여 방편(方便)으로 이승(二乘)을 말쑴 하신 것이라 이것은 불요의(不了義) 이니라. (사의품 = 四衣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