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성(佛性)은 존재(存在)한다.
구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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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8 10:04
4. 불성(佛性)은 존재(存在)한다.
열바경(涅槃經)에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 하니 불성(佛性)은 중생(衆生)의 각각(各各) 개체(個體)에내재(內在)하고 있는 것이라 이해(理解)하고 있으나 실(實)인즉 그와같이 이해(理解)해서는 아니 된다고 경(經)에는 가르키고 있다. 경전(經典)에서 말하고자 하는 골자(骨子)는 "불성(佛性)을 중생(衆生)이다.,,라고 하는 점(點)이다. 만일 중생(衆生)가운데 별도(別途)로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다면 그것은 잘못된 이해(理解)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衆生)이 그대로 불성(佛性)이고 불성(佛性)이라하면 바로 그대로 중생(衆生)이기 때문이라 한다. 시절(時節)의 차위(差違)에서 때로는 정(淨 = 佛性) 때로는 부정(不淨 = 衆生)으로 보이는데 불과(佛過)하다 하였다. 불성(佛性)이 중생중(衆生中)에 있는 것이 아니고 중생(衆生)과 불성(佛性)은 본질상(本質上) 같은 것이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생(衆生)이란 번뇌(煩惱)에 덮혀있는 상태(狀態)의 불성(佛性)을 의미(意味)하며 불성(佛性)이라 하면 번뇌(煩惱)의 상태(狀態)가 제거(除去)될 상태(狀態)의 중생(衆生)을 의미(意味)한다. 그러므로 나타나는 상태(狀態) 여하(如何)에서 불성(佛性)이라 하기도 하고 중생(衆生)이라 하기도 하여 구별(區別)한데 불과(不過)하며 본성상(本性上) 양자(兩者)는 하나이다. 그와같이 생각할 때 모든 존재(存在)는 그대로 불성(佛性)의 표현(表現)이라 할 수 있고 중생(衆生)의 의미 범위(意味 範圍)도 인간(人間)에서, 생물(生物)에서, 우주존재(宇宙存在) 전체(全體)로 넓혀야 할 것이라 "일체중생(一切衆生)은 실유불성(悉有佛性)이다를 일체중생실유(一切衆生悉有)는 불성(佛性)이다 하여 불성(佛性)이 내재(內在)한다는 해석 대신(解釋 代身)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실유(悉有 = 全存在)는 불성(佛性)의 현현(顯現)이라 동견(同見)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안전(眼前)의 제현상(諸現象)인 초목(草木), 와석(瓦石), 견마등(犬馬等)의 하나하나가 불성(佛性) 그 자체(自體), 불성(佛性)의 전체(全體)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불성(佛性)의 상(相)으로서 용(用)으로 나타난 것이고 불성(佛性)의 전체(全體)라고는 할 수 없다. 열반경 삼십이(涅槃經 三十二)의 군맹평상(群盲評象)의 비유(比喩)는 이것을 이해(理解하는데 가장 적절(適切)한 비유(譬喩)라 할 수 있다. 중맹모상(衆盲模象)에 일부(一部) 일부(一部)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상전체(象全體)는 아니다.그러나 상전체(象全體)는 상(象)의 일부분(一部分) 일부분(一部分)을 떠나서는 존재(存在)할 수 없다. 이와같이 일(一)과 다(多)가 상즉사입(相即上入)하여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총합체(總合體)가 불성(佛性)이다. 여하(如何)한 작은 존재(存在)도 불성(佛性)이 나타남이 아님이 없다. 불성(佛性)을 알고 불성(佛性)을 볼려거든 전존재(全存在)를 보아야 할 것이다. 즉(即) 견성(見性)을 할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보살도(菩薩道)에 전념(專念)해야 할 것이다.
열바경(涅槃經)에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 하니 불성(佛性)은 중생(衆生)의 각각(各各) 개체(個體)에내재(內在)하고 있는 것이라 이해(理解)하고 있으나 실(實)인즉 그와같이 이해(理解)해서는 아니 된다고 경(經)에는 가르키고 있다. 경전(經典)에서 말하고자 하는 골자(骨子)는 "불성(佛性)을 중생(衆生)이다.,,라고 하는 점(點)이다. 만일 중생(衆生)가운데 별도(別途)로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다면 그것은 잘못된 이해(理解)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衆生)이 그대로 불성(佛性)이고 불성(佛性)이라하면 바로 그대로 중생(衆生)이기 때문이라 한다. 시절(時節)의 차위(差違)에서 때로는 정(淨 = 佛性) 때로는 부정(不淨 = 衆生)으로 보이는데 불과(佛過)하다 하였다. 불성(佛性)이 중생중(衆生中)에 있는 것이 아니고 중생(衆生)과 불성(佛性)은 본질상(本質上) 같은 것이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생(衆生)이란 번뇌(煩惱)에 덮혀있는 상태(狀態)의 불성(佛性)을 의미(意味)하며 불성(佛性)이라 하면 번뇌(煩惱)의 상태(狀態)가 제거(除去)될 상태(狀態)의 중생(衆生)을 의미(意味)한다. 그러므로 나타나는 상태(狀態) 여하(如何)에서 불성(佛性)이라 하기도 하고 중생(衆生)이라 하기도 하여 구별(區別)한데 불과(不過)하며 본성상(本性上) 양자(兩者)는 하나이다. 그와같이 생각할 때 모든 존재(存在)는 그대로 불성(佛性)의 표현(表現)이라 할 수 있고 중생(衆生)의 의미 범위(意味 範圍)도 인간(人間)에서, 생물(生物)에서, 우주존재(宇宙存在) 전체(全體)로 넓혀야 할 것이라 "일체중생(一切衆生)은 실유불성(悉有佛性)이다를 일체중생실유(一切衆生悉有)는 불성(佛性)이다 하여 불성(佛性)이 내재(內在)한다는 해석 대신(解釋 代身)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실유(悉有 = 全存在)는 불성(佛性)의 현현(顯現)이라 동견(同見)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안전(眼前)의 제현상(諸現象)인 초목(草木), 와석(瓦石), 견마등(犬馬等)의 하나하나가 불성(佛性) 그 자체(自體), 불성(佛性)의 전체(全體)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불성(佛性)의 상(相)으로서 용(用)으로 나타난 것이고 불성(佛性)의 전체(全體)라고는 할 수 없다. 열반경 삼십이(涅槃經 三十二)의 군맹평상(群盲評象)의 비유(比喩)는 이것을 이해(理解하는데 가장 적절(適切)한 비유(譬喩)라 할 수 있다. 중맹모상(衆盲模象)에 일부(一部) 일부(一部)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상전체(象全體)는 아니다.그러나 상전체(象全體)는 상(象)의 일부분(一部分) 일부분(一部分)을 떠나서는 존재(存在)할 수 없다. 이와같이 일(一)과 다(多)가 상즉사입(相即上入)하여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총합체(總合體)가 불성(佛性)이다. 여하(如何)한 작은 존재(存在)도 불성(佛性)이 나타남이 아님이 없다. 불성(佛性)을 알고 불성(佛性)을 볼려거든 전존재(全存在)를 보아야 할 것이다. 즉(即) 견성(見性)을 할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보살도(菩薩道)에 전념(專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