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분명히 원칙(圓測)의
구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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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9 20:17
이것은 분명히 원칙(圓測)의 창의적인 해설을 허술히 대할 수 없는 학적 가치를 오히려 인정하는 것 밖에는 안 된다 누구의 설보다도 강적이라고 생각되었기에 그토록 깍아 내리기에 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그것이 이론만 가지고는 오히려 부족하였던지 선후(先後)가 당착(撞着)되는 도청이라는 허위 사실을 날조하여서까지 마치 인간적인 면에 흠이 있는 것처럼 꾸며 자기들의 전통만을 내세우려고 온갖 수단을 다한 것이다. 이로써 미루어 볼 때 유식(唯識)에 관한 원칙(圓測)이나 도증(道證)의 저술이 전하지 않은 것도 이들의 흉계에 의하여 유포가 금지되었던 탓이라고 봄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의 과오를 탓하기 전에 우리 자신이 왜 우리 조상의 저술들을 아끼며 전하지 못하였던가 부터가 자책을 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저 우리의 것이라면 무작정 무시하기가 일쑤요 남의 것이라야만 의의를 느낄 만큼 치졸(稚拙)하여진 그 습성이 부끄렵다. 그리고 허구의 사실이라는 둘째 이유는 이론을 떠나 원칙(圓測)의 인품이나 학력으로 미루어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데 있다. 원칙(圓測)은 위에서도 본 바와 같이 칙천무후(則天武后)에 의하여 불(佛)과 같은 존숭(尊崇)을 받은 고승(高僧)이요 당시 불교(佛敎)계의 중진으로 활약한 것은 사실이나 그의 천성(天性)은 오히려 산수의 자연을 즐겨 한적한 생활 속의 정진(精進)을 좋아하였다. 일찌기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에 머물렀다가 다시 거기서도 30여 리나 떨어져 있는 궁변(窮僻)한 산중으로 들어가 8년 동안이나 그 한 곳에서 한거정지(閒居靜志)하던 중 승도(僧徒)들의 청으로 전에 있던 서명사(西明寺)로 돌아가 성유식론(成唯識論)을 강(講)하였다. 원칙(圓測)의 사람됨과 천성(天性)이 짐작되거니와 그런 분이 한 때의 명성을 얻기 위하여 일부러 남의 의도를 앞지르면서까지 발표를 서둘렀을리가 만무하다. 성유식론(成唯識論)이 역출된 것은 규기(窺基)가 28세 되던 때의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원칙(圓測)은 바로 45세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연령의 차이를 생각하더라도 제자뻘밖에 안 되는 젊은 사람과 경쟁을 하기 위하여 더구나 증회(贈賄) 도청 하였다 함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 규기(窺基)는 신진 기예(氣銳)라고 할까 그야말로 선배를 능가하고 싶은 의욕이 있었을는지 몰을 일이요 따라서 성유식론(成唯識論) 번역의 임무를 독천(獨擅)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래도 그를 지도한 현장(玄奘)이 구태여 원칙(圓測)에게만 청강을 불허할 만큼 그렇게 용렬(庸劣)하였으리라고는 생각 되지 않는다. 그것이 무슨 비법(秘法)이라도 전수(傳授)하는 것이라면 모르되 제설(諸說)을 합유(合糅) 번역하는 것쯤 남이 들어서 안 될 만큼 공개 못할 것이 무엇인가. 도대체가 대승(大乘)의 불도(佛道)를 밝히려는 사람들에게 당치 않은 허구(虛構)인 것이요 필시 자은종(慈恩宗)의 말유(末流)들의 소위임이 틀림이 없다. 성유식론(成唯識論)의 역출은 규기(窺基)가 28세 원칙(圓測)이 45세 되던 때의 일이라고 하였다. 또 규기(窺基)는 23세에 범어(梵語)를 25세 때부터 역경(譯經)에 종사하였음을 말하였다. 그러니까 성유식론(成唯識論)의 역출엔 아무리 재분(才分)이 출중(出衆)한 규기(窺基)였다고 하지만 아직도 역경(譯經)의 경험이 일천(一淺)하던 때의 일이라고 하여 무방할 것이다. 원칙(圓測)이 몇 살 때부터 범어(梵語) 공부를 하였는가는 분명치 않으나 본래 어학의 소질이 놀라와 6개국어에 능통하였던 만큼 일찍부터 범어(梵어를 마스터하였으리라고 추측이 된다. 인도(印度)로 부터 귀환한 현장(玄奘)과 상면한 때의 원칙(圓測)의 나이가 33세였다고 하였거니와 그때에 원칙(圓測)은 이미 범어(梵語) 원서에 능통하였음직도 한 일이다. 아니 그런 추측은 그만두고 가사 현장(玄奘)을 상면한 이후부터 범어 공부를 하였다 치더라도 규기(窺基)의 학력과는 선후의 차가 너무나 벌어진다. 말하자면 규기(窺基)에 비하여 원칙(圓測)은 어느 모로 보나 비교가 안 될 만큼 이미 원숙기에 가까왔던 것이라고 봄이 무방할 것이다. 이러한 원칙(圓測)이 무엇 때문에 구구하게 규기(窺基)에게 하는 강(講)을 도청하여야만 하였겠는가. 그럴리가 만무하다. 이것이 오히러 원칙(圓測)의 신력을 시기하는 나머지 자은종(慈恩宗)의 아류(亞流) 후배자들이 그들의 종파의식(宗派意識)에 살로잡혀 취해진 낭설이라고 하는 소이(所以) 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