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체론
구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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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1 13:17
3. 본체론(本體論 = 이제중도위체설(二諦中道爲體說)
중생(衆生)은 본래 인연시생시멸(因緣是生是滅) 유무(有無)에 집착(執着)하여 중(中)을 모른다. 이(理)는 유일변(有一邊)에도 무일변(無一邊)에도 편수(偏隨)한 것이 아니므로 불이(不二)의 중(中)이라 하는 것이요 이 중(中)이야말로 삼세시방제불보살(三世十方諸佛菩薩)의 소행지도(所行之道) 즉 중도(中道)인 것이다 진속이제(眞俗二諦)는 이 불이중도(不二中道)의 이(理)를 밝히기 위한 것이요, 따라서 불이중도(不二中道)를 이제(二諦)의 체(體)라고 하는 것이 섭령상승(攝嶺相 承)의 기본사상(基本思想)이다. 제법실상(諸法實相)은 언망려절(言忘慮絶)하여 일찌기 진속(眞俗)의 어느 것도 아니므로 이름하여 체(體)라고 하는 것이나 이제(二諦)의 체(體)도 길장(吉藏)에 의하면 오가(五家)가 있다고 한다.
제1은 유(有)를 체(體)로 하고 공(空)을 용(用)으로 하는 것이니 절유입공(折有入空)하는 것이라. 인식론적으로 유(有)가 본(本)이요 공(空)이 말(末)이라는 것이다.
제2는 공(空)을 체(體)로 하고 유(有)를 용(用)으로 하는 것이니 세간법(世間法)이 모두 공(空)으로부터 생(生)하는 것이므로 존재론적으로 공(空)이 본(本)이요 유(有)가 말(末)이라는 것이다.
제3은 이제(二諦)가 각기 체(體)를 달리한다는 것이니 세제가유(世諦假有)를 세제체(世諦體)로 하고 공무유상(空無有相)을 진제체(眞諦體)로 하는 것이다.
제4는 이제(二諦)가 비록 일체(一體)이긴 하나 유(有)로써 약(約)하면 속제(俗諦)가 되고 공(空)으로써 약(約)하면 진제(眞諦)가 된다는 입장이다.
제5는 승랑(僧朗)의 중도(中道)로써 체(體)로 하는 것인 바 불이이이(不二 而二)이므로 이제(二諦)의 이(理)가 밝혀지고 이이불이(二而不二)이므로 중도(中道)의 의(義)가 선다고 한다. 대승현론(大乘玄論) 권일에 참조(卷一參照) 용광사(龍光寺) 승작(僧綽)은 이제이체(二諦異體)를 주장한 것인 만큼 중도(中道)를 밝히지 못한 것이요 개선사(開善寺) 지장(知藏)은 중도(中道)로써 이제체(二諦體)로 하고 있으나 이제합명(二諦合明)의 중도(中道)가 아니라 결국은 진제(眞諦)로써 체(體)로 하고 말았다. 이것은 개선(開善)이 비록 섭산(攝山) 몸소 승랑(僧朗)을 찾아 배운 것은 아니나 또한 승랑(僧朗)의 사상(思想)을 들은 바는 있었으므로 중도(中道)로써 이제체(二諦體)로 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직접 음지(音旨)를 친승(親承)한 것이 아니므로 작의승벽(作義承僻)하여 진제(眞諦)로써 체(體)로 하게 된 것이라고한다. 혹자는 불생불멸(不生不滅) 부단불상(不斷不常)이라는 말만 들으면 문득 진제(眞諦)라고 하며 이(理)에느 차별이 없다고 하는 만큼 개선(開善)도 진제(眞諦)를 불이(不二)의 중도(中道)로 잘못 알았던 것이다. 승랑(僧朗)이 중도(中道)로써 이제체(二諦體)로 한다는 것은 비진비속(非眞非俗)을 이제체(二諦體)로 한다는 것이요 따라서 진속(眞俗)을 용(用)으로 하는 것인 바 이 진속(眞俗)은 또한 이교(理敎)라고도 하며 또한 중가(中假)라고도 한다. 그러나 승랑(僧朗)의 이제합명중도(二諦合明中道)에 있어서 중가(中假)는 거듭하여 중가(中假)가 되고 이교(理敎)는 거듭하여 이교(理敎)가 되며 뿐만 아니라 체용(體用)도 거듭하여 체용(體用)이 되는 것이므로 결국(結局)은 불이(不二)를 체(體)로 하고 이(二)를 용(用)으로 하는 것이다. (계속
중생(衆生)은 본래 인연시생시멸(因緣是生是滅) 유무(有無)에 집착(執着)하여 중(中)을 모른다. 이(理)는 유일변(有一邊)에도 무일변(無一邊)에도 편수(偏隨)한 것이 아니므로 불이(不二)의 중(中)이라 하는 것이요 이 중(中)이야말로 삼세시방제불보살(三世十方諸佛菩薩)의 소행지도(所行之道) 즉 중도(中道)인 것이다 진속이제(眞俗二諦)는 이 불이중도(不二中道)의 이(理)를 밝히기 위한 것이요, 따라서 불이중도(不二中道)를 이제(二諦)의 체(體)라고 하는 것이 섭령상승(攝嶺相 承)의 기본사상(基本思想)이다. 제법실상(諸法實相)은 언망려절(言忘慮絶)하여 일찌기 진속(眞俗)의 어느 것도 아니므로 이름하여 체(體)라고 하는 것이나 이제(二諦)의 체(體)도 길장(吉藏)에 의하면 오가(五家)가 있다고 한다.
제1은 유(有)를 체(體)로 하고 공(空)을 용(用)으로 하는 것이니 절유입공(折有入空)하는 것이라. 인식론적으로 유(有)가 본(本)이요 공(空)이 말(末)이라는 것이다.
제2는 공(空)을 체(體)로 하고 유(有)를 용(用)으로 하는 것이니 세간법(世間法)이 모두 공(空)으로부터 생(生)하는 것이므로 존재론적으로 공(空)이 본(本)이요 유(有)가 말(末)이라는 것이다.
제3은 이제(二諦)가 각기 체(體)를 달리한다는 것이니 세제가유(世諦假有)를 세제체(世諦體)로 하고 공무유상(空無有相)을 진제체(眞諦體)로 하는 것이다.
제4는 이제(二諦)가 비록 일체(一體)이긴 하나 유(有)로써 약(約)하면 속제(俗諦)가 되고 공(空)으로써 약(約)하면 진제(眞諦)가 된다는 입장이다.
제5는 승랑(僧朗)의 중도(中道)로써 체(體)로 하는 것인 바 불이이이(不二 而二)이므로 이제(二諦)의 이(理)가 밝혀지고 이이불이(二而不二)이므로 중도(中道)의 의(義)가 선다고 한다. 대승현론(大乘玄論) 권일에 참조(卷一參照) 용광사(龍光寺) 승작(僧綽)은 이제이체(二諦異體)를 주장한 것인 만큼 중도(中道)를 밝히지 못한 것이요 개선사(開善寺) 지장(知藏)은 중도(中道)로써 이제체(二諦體)로 하고 있으나 이제합명(二諦合明)의 중도(中道)가 아니라 결국은 진제(眞諦)로써 체(體)로 하고 말았다. 이것은 개선(開善)이 비록 섭산(攝山) 몸소 승랑(僧朗)을 찾아 배운 것은 아니나 또한 승랑(僧朗)의 사상(思想)을 들은 바는 있었으므로 중도(中道)로써 이제체(二諦體)로 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직접 음지(音旨)를 친승(親承)한 것이 아니므로 작의승벽(作義承僻)하여 진제(眞諦)로써 체(體)로 하게 된 것이라고한다. 혹자는 불생불멸(不生不滅) 부단불상(不斷不常)이라는 말만 들으면 문득 진제(眞諦)라고 하며 이(理)에느 차별이 없다고 하는 만큼 개선(開善)도 진제(眞諦)를 불이(不二)의 중도(中道)로 잘못 알았던 것이다. 승랑(僧朗)이 중도(中道)로써 이제체(二諦體)로 한다는 것은 비진비속(非眞非俗)을 이제체(二諦體)로 한다는 것이요 따라서 진속(眞俗)을 용(用)으로 하는 것인 바 이 진속(眞俗)은 또한 이교(理敎)라고도 하며 또한 중가(中假)라고도 한다. 그러나 승랑(僧朗)의 이제합명중도(二諦合明中道)에 있어서 중가(中假)는 거듭하여 중가(中假)가 되고 이교(理敎)는 거듭하여 이교(理敎)가 되며 뿐만 아니라 체용(體用)도 거듭하여 체용(體用)이 되는 것이므로 결국(結局)은 불이(不二)를 체(體)로 하고 이(二)를 용(用)으로 하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