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구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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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 22:20
ㅡ 고구려(高句麗)의 승냥(僧朗)에 대한 인식방법론(認識方法論)과 본체론(本體論) (열암의 정평 = 列岩의 正評)
※한국 사람의 철학적 사색 능력은 먼저 불교 사상의 획기적 전개로부터 발휘(發揮)되기 시작하였다.
1. 삼론종(三論宗)의 선구자(先驅者)
승랑(僧朗)은 고구려(高句麗)의 요동성(遼東城)의 사람이다. 일찍이 중국(中國)에 가서 라섭(羅什)계통의 삼론(三論) 사상(思想)을 공부하였다. 제말건무년간(齋末建武年間=494 ㅡ 497)에 강남으로 내려가 종산(鍾山)의 초당사(草堂寺)에 머물렀다. 그 당시 하북에서는 유(有)를 밝히는 비담(毗曇)이 편행(偏行)하였다. 비담(毗曇)은 무아(無我)의 경지는 체득하나 법유성(法有性)에 집착하여 가유(假有)에 미혹(迷或)되고 있었다. 또 강남(江南)에서는 성실론(成實論)이 성행하였다. 성실(成實)은 아(我)와 법(法)의 이공(二空)을 구변(具辨)하나 밝힘이 미진하여 공(空)을 설(說)할 뿐, 불공(不空)을 설하지 못하였다. 비담(毗曇)은 유(有)에 집착하고 성실(成實)은 공(空)에 집착하여 서로 배척하였던 만큼 도(道)를 막고 사견(邪見)만 늘어 모두 불교(佛敎)의 첨된 뜻을 잃고 있었다. 그러므로 승랑(僧朗)이 강남(江南)에 이르자 성실론자들과 토론을 거듭하게 되었다. 승랑(僧朗)의 날카로운 비판을 감히 당해내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승랑(僧朗)의 삼론(三論) 사상(思想)이 널리 강남(江南)에 퍼지게 되었다. 삼론(三論) 사상(思想)은 라습(羅什) 이래 상승(相承)하여 왔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연대가 오래됨에 따라 문소(文疏)가 영락(零落)하여 중국은 제조(齊朝)이래 현망(玄網)이 거의 끊어졌던 것이다. 승랑(僧朗)이 종산 초당사(草堂寺)에 머무르고 있을 때 마침 주옹(周顒)이라는 은사(隱士)가 있어서 승랑(僧朗)으로부터 삼론(三論)의 근본 사상을 배웠다. 승랑(僧朗)은 본래 박학하고 사색력이 해보(該普)하여 어느 경율(經律)에나 능통하였으나 특히 화엄(華嚴)과 삼론(三論)에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천성(天性)이 발표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오히려 행선(行禪)을 겸하여 은거수덕(隱居修德)하기를 즐겼다. 그런 만큼 저술을 남긴 일도 없다. 그러한 영향 때문인지 승랑(僧朗)에게 수학(修學)한 주옹(周顒)도 처음에는 저술을 꺼렸다. 후에 지림법사(智琳法師)의 권유에 의하여 비로소 삼종론(三宗論)이라는 저술을 내게 된 것 이것이 승랑(僧朗)의 삼론(三論) 사상(思想)을 전하 것임은 말할 것도없다. 승랑(僧朗)은 그 후 양무제(梁武帝) ,초(初)에 섭산(攝山) 서하사(棲霞寺)로 갔다. 양무제(梁武帝)는 원래 삼보(三寶)를 경신(敬信)하여 마지않는 터이였고 역시 남방(南方)의 성실론(成實論)을 배운 것이었으나 승랑(僧朗)이 섭산(攝山)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심견기중(深見器重)하여 칙령(勅令)으로써 지관사(止觀寺) 승전(僧铨)등 10명의 승려(僧呂)를 섭산(攝山)으로 보내어 삼론(三論)을 배우게 하였다. 이 10명 중에서 9명은 수학(受學)을 게을리하였고 오직 승전(僧銓)이 학을 설취하여 다시 그 문하에서 법랑(法朗)을 비롯하여 4인의 명승(名僧)들을 내어 강남에 승랑(僧朗)의 삼론(三論) 사상(思想)이 떨치게 된 것이다. 이 법랑(法朗)의 법계(法系)를 계승한 것이 중국에 있어서 삼론종(三論宗)을 대성한 길장(吉藏) 가상대사(嘉祥大師)인 것이다. 양무제(梁武帝)는 드디어 성실론(成實論)을 숭상하던 것을 버리고 승랑(僧朗)의 사상(思想)에 의지하여 대승(大乘)의 견지에서 새로이 장소(章疏)를 짓게 하였다. 위에서도 본 바와 같이 승랑(僧朗)의 비판을 당해낼 사람이 없었을 만큼 중국의 남북토(南北土)를 통하여 뚜렸한 존재이었음이 짐작되거니와 급기야 양무제(梁武帝)의 신앙(信仰) 방향까지 전환시킨 승랑(僧朗)이었음이 틀림 없다. 섭산(攝山) 서하사(棲霞寺)에는 법도(法度)라는 고승(高僧)이 있었다. 고절(苦節)로서 이름이 높았었다. 승랑(僧朗)은 그의 제자(弟子)로서 선사(先師)를 계종(繼踵)하여 산사(山寺)를 보망(復網)한 것으로 되어 있다. 법도(法度)는 일찌기 북토(北土)에 유학하여 중경(衆經)에도 능통하였으나 평소에 원생안양(願生安養)하여 무량수경(無量壽經)을 여러 차례 편강(遍講)하였다 고 한다. 그렇다면 승랑(僧朗)은 법도(法度)로부터 섭산(攝山)의 법계(法系)는 계승(繼承)하였을망정 삼론(三論) 사상 자체를 전수(傳受)하였다고는 보기 곤란할 것이다. 법도(法度)는 제영원(齊永元) 2년에 섭산(攝山)에서 입적(入寂)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서기 500년에 해당하므로 6세기에 들어서면서 섭산(攝山)의 종풍(宗風)이 승랑(僧朗)의 삼론종(三論宗)으로 확립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섭산(攝山)의 종풍(宗風)은 승랑(僧朗)의 사상에 의하여 대표되는 것이요, 따라서 승랑(僧朗)을 섭산대사(攝山大師), 섭령대사(攝嶺大師), 그저 섭산(攝山) 또는 섭령(攝嶺)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길장(吉藏) 가상대사(嘉祥大師)는 이 섭령(攝嶺)의 적계(嫡系)로서 언제나 그의 사상의 근거를 밝힐 때에는 섭령 상승(攝嶺 相承)의 전통적인 승랑(僧朗)의 설을 인용하곤 하였다. 승랑(僧朗)이 북토(北土)에서 일찌기 삼론(三論) 사상을 배운 것은 사실이겠으나 그것은 중론(中論), 백론(百論), 십이문론(十二門論)과 기타에 관한 해석 정도이었을 것이요 그 전체를 일관하는 근본 사상을 천명하여 뚜렸한 삼론종(三論宗)의 기초를 확립한 것은 승랑(僧朗) 자신의 강인한 사색력에 의한 것임이 틀림 없다. 삼론종(三論宗) 중흥(中興)의 조(祖)라고도 하거니와 삼론종(三論宗)이 길장(吉藏)에 이르러 대성한 것이라면 승랑(僧朗)은 그 삼론종(三論宗)의 선구라고 하여 타당할 것이다.
※한국 사람의 철학적 사색 능력은 먼저 불교 사상의 획기적 전개로부터 발휘(發揮)되기 시작하였다.
1. 삼론종(三論宗)의 선구자(先驅者)
승랑(僧朗)은 고구려(高句麗)의 요동성(遼東城)의 사람이다. 일찍이 중국(中國)에 가서 라섭(羅什)계통의 삼론(三論) 사상(思想)을 공부하였다. 제말건무년간(齋末建武年間=494 ㅡ 497)에 강남으로 내려가 종산(鍾山)의 초당사(草堂寺)에 머물렀다. 그 당시 하북에서는 유(有)를 밝히는 비담(毗曇)이 편행(偏行)하였다. 비담(毗曇)은 무아(無我)의 경지는 체득하나 법유성(法有性)에 집착하여 가유(假有)에 미혹(迷或)되고 있었다. 또 강남(江南)에서는 성실론(成實論)이 성행하였다. 성실(成實)은 아(我)와 법(法)의 이공(二空)을 구변(具辨)하나 밝힘이 미진하여 공(空)을 설(說)할 뿐, 불공(不空)을 설하지 못하였다. 비담(毗曇)은 유(有)에 집착하고 성실(成實)은 공(空)에 집착하여 서로 배척하였던 만큼 도(道)를 막고 사견(邪見)만 늘어 모두 불교(佛敎)의 첨된 뜻을 잃고 있었다. 그러므로 승랑(僧朗)이 강남(江南)에 이르자 성실론자들과 토론을 거듭하게 되었다. 승랑(僧朗)의 날카로운 비판을 감히 당해내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승랑(僧朗)의 삼론(三論) 사상(思想)이 널리 강남(江南)에 퍼지게 되었다. 삼론(三論) 사상(思想)은 라습(羅什) 이래 상승(相承)하여 왔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연대가 오래됨에 따라 문소(文疏)가 영락(零落)하여 중국은 제조(齊朝)이래 현망(玄網)이 거의 끊어졌던 것이다. 승랑(僧朗)이 종산 초당사(草堂寺)에 머무르고 있을 때 마침 주옹(周顒)이라는 은사(隱士)가 있어서 승랑(僧朗)으로부터 삼론(三論)의 근본 사상을 배웠다. 승랑(僧朗)은 본래 박학하고 사색력이 해보(該普)하여 어느 경율(經律)에나 능통하였으나 특히 화엄(華嚴)과 삼론(三論)에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천성(天性)이 발표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오히려 행선(行禪)을 겸하여 은거수덕(隱居修德)하기를 즐겼다. 그런 만큼 저술을 남긴 일도 없다. 그러한 영향 때문인지 승랑(僧朗)에게 수학(修學)한 주옹(周顒)도 처음에는 저술을 꺼렸다. 후에 지림법사(智琳法師)의 권유에 의하여 비로소 삼종론(三宗論)이라는 저술을 내게 된 것 이것이 승랑(僧朗)의 삼론(三論) 사상(思想)을 전하 것임은 말할 것도없다. 승랑(僧朗)은 그 후 양무제(梁武帝) ,초(初)에 섭산(攝山) 서하사(棲霞寺)로 갔다. 양무제(梁武帝)는 원래 삼보(三寶)를 경신(敬信)하여 마지않는 터이였고 역시 남방(南方)의 성실론(成實論)을 배운 것이었으나 승랑(僧朗)이 섭산(攝山)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심견기중(深見器重)하여 칙령(勅令)으로써 지관사(止觀寺) 승전(僧铨)등 10명의 승려(僧呂)를 섭산(攝山)으로 보내어 삼론(三論)을 배우게 하였다. 이 10명 중에서 9명은 수학(受學)을 게을리하였고 오직 승전(僧銓)이 학을 설취하여 다시 그 문하에서 법랑(法朗)을 비롯하여 4인의 명승(名僧)들을 내어 강남에 승랑(僧朗)의 삼론(三論) 사상(思想)이 떨치게 된 것이다. 이 법랑(法朗)의 법계(法系)를 계승한 것이 중국에 있어서 삼론종(三論宗)을 대성한 길장(吉藏) 가상대사(嘉祥大師)인 것이다. 양무제(梁武帝)는 드디어 성실론(成實論)을 숭상하던 것을 버리고 승랑(僧朗)의 사상(思想)에 의지하여 대승(大乘)의 견지에서 새로이 장소(章疏)를 짓게 하였다. 위에서도 본 바와 같이 승랑(僧朗)의 비판을 당해낼 사람이 없었을 만큼 중국의 남북토(南北土)를 통하여 뚜렸한 존재이었음이 짐작되거니와 급기야 양무제(梁武帝)의 신앙(信仰) 방향까지 전환시킨 승랑(僧朗)이었음이 틀림 없다. 섭산(攝山) 서하사(棲霞寺)에는 법도(法度)라는 고승(高僧)이 있었다. 고절(苦節)로서 이름이 높았었다. 승랑(僧朗)은 그의 제자(弟子)로서 선사(先師)를 계종(繼踵)하여 산사(山寺)를 보망(復網)한 것으로 되어 있다. 법도(法度)는 일찌기 북토(北土)에 유학하여 중경(衆經)에도 능통하였으나 평소에 원생안양(願生安養)하여 무량수경(無量壽經)을 여러 차례 편강(遍講)하였다 고 한다. 그렇다면 승랑(僧朗)은 법도(法度)로부터 섭산(攝山)의 법계(法系)는 계승(繼承)하였을망정 삼론(三論) 사상 자체를 전수(傳受)하였다고는 보기 곤란할 것이다. 법도(法度)는 제영원(齊永元) 2년에 섭산(攝山)에서 입적(入寂)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서기 500년에 해당하므로 6세기에 들어서면서 섭산(攝山)의 종풍(宗風)이 승랑(僧朗)의 삼론종(三論宗)으로 확립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섭산(攝山)의 종풍(宗風)은 승랑(僧朗)의 사상에 의하여 대표되는 것이요, 따라서 승랑(僧朗)을 섭산대사(攝山大師), 섭령대사(攝嶺大師), 그저 섭산(攝山) 또는 섭령(攝嶺)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길장(吉藏) 가상대사(嘉祥大師)는 이 섭령(攝嶺)의 적계(嫡系)로서 언제나 그의 사상의 근거를 밝힐 때에는 섭령 상승(攝嶺 相承)의 전통적인 승랑(僧朗)의 설을 인용하곤 하였다. 승랑(僧朗)이 북토(北土)에서 일찌기 삼론(三論) 사상을 배운 것은 사실이겠으나 그것은 중론(中論), 백론(百論), 십이문론(十二門論)과 기타에 관한 해석 정도이었을 것이요 그 전체를 일관하는 근본 사상을 천명하여 뚜렸한 삼론종(三論宗)의 기초를 확립한 것은 승랑(僧朗) 자신의 강인한 사색력에 의한 것임이 틀림 없다. 삼론종(三論宗) 중흥(中興)의 조(祖)라고도 하거니와 삼론종(三論宗)이 길장(吉藏)에 이르러 대성한 것이라면 승랑(僧朗)은 그 삼론종(三論宗)의 선구라고 하여 타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