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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천

구경사 0 211
백낙천(白樂天)의 시(詩)에 이런 것이 있다.
사람들이란 흡사 꽃 찾아다니는 벌과 같아서
아침 저녁 동서로 날아다니며 바쁘지마는
백 가지 꽃을 따다가 꿀을 만들어 놓았댔자
결국은 신고한 것이 한바탕 허사로다.
하고 읊었다. 사람들이 불철 주야 바쁜 결과 어느 시점에서 자기가 얻고자 한 자유나 권력이나 재산을 얻었다 하자. 그러나 얼마간 지나는 동안 그것은 다시 잃어버리게 된다. 모두가 헛 좋아한 것이다. 결국 아무것도 성취한 것이 없는 것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이 점에 대해서 이런 저런 체험과 심각한 경험을 통한 논리(論理)가 있다. 그들은 바쁜 결과 얻어지는 것과 또 얻어지는 것의 잃어지는 것에 대한 실망. 허무. 비관을 통하여 소극적인 관념을 자아내게 된다. 그러나 불법(佛法)을 배우는 일만은 모든 것이 헛된 일이 되지 않게 된다. 우리는 하루바삐 불교(佛敎)를 배우는 일에 힘을 기울임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람들에게 악행(惡行)을 버리고 선(善)한 일을 하라고 권(勸)하는 것은 불교뿐 아니고 그리스도교. 유교. 마호멧교 등 어디서나 주장하는 일이다. 그러나 선행(善行)을 하면 무엇이 아름답다는 것인가? 인과율(因果律)에서는 사람이 선을 행하면 선의 결과가 오고, 악을 행하면 악한 댓가를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유교에서는 선을 행하는 목적이 대개 가정적인 데 있다. 적선을 하면 남은 경사가 있고 적악을 하면 남은 재앙이 있다고 하여 부모(父母)가 선(善)을 많이 적(積)함으로써 그 후손에게 복이 되어 자손이 번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꼭 이렇게만 되는 것은 아니다. 부모는 한량없이 선량한데 자손은 돌연히 악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악한 부모에 선한 자손이 나오기도 하는 등 정확한 공식이 없다. 제요는 착하였지마는 그의 아들인 단주는 폭인이였고, 고수는 행실이 간악하였으나 그 아들 순은 대효하여 그의 어버이나 형제들의 시중을 잘 들어 주었다. 요즘 흔히들 말하고 있는, "좋지 못한 일만을 일삼고 있는 사람들이 재산(財産)과 권력(權力)을 얻어 잘 살아가고 있고, 착한 사람은 오히려 못사는 사회이다,, 라는 말이 이런 류이다. 그려면 선악(善惡), 화복(禍福)에 무슨 규율이 있어 반드시 사람으로 하여금 선하라고만 하는 것일까. 이 문제는 필히 불교에서 말한 삼세 인과(三世因果)라야 해결이 된다. 일체 종교(宗敎)가, 선을 권하는 그 출발점은 같지만 그 결론에 있어서는 불교를 따라올 수가 없다. 불교를 배우고 착한 일만을 부지런히 하면 현실적으로 당하는 여러 가지 불만. 불행(不幸). 재앙(災殃)이 모두 소멸되고 선과(善果)가 성취(成就)되는 때에는 자연히 행복(幸福)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축적하는 마음에 대하여 언급코자 한다. 이것이야 말로 정말 괴로운 일이다. 우리들의 마음은 모두 밖으로 달아나서 헤매고 있다. 색(色)에, 재물(財物)에, 명리(名利)에, 소리에 헤매고 있다. 왜 이러느냐 하면 마음에 만족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부단히 낮은 데서 높은 데로 향하여 움직인다. 우선 의식에 곤란을 느끼는 사람은 의식 문제 해결에 집요한다. 그러나 의식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나아가서 거처를 잘 꾸미고 싶어한다. 거처 문제가 마음 먹은 대로 해결이 되면 풍족한 생활과 안락한 가정, 그리고 좋은 아내와 훌륭한 자식을 낳아 기르고 싶어한다. 이런 것 까지가 모두 충족이 이루워졌을 때에는 지위가 높아지고 싶어한다. 지위가 높아지면 더 높은 차원으로 권력을 누리고 싶어한다. 사람이 욕망을  따르는 현상이란 말(마 =馬)이 질주하는 것과 같다. 뒷 발굽이 앞 발굽을 쫒아 잡을려고 하면 벌써 앞 발굽은 땅을 차고 공중을 난다. 그러므로 달리는 말의 네 발굽은 땅에 있을 시간이 없다. "안락(安樂)하면 족(足)하다고,, 하였건만 사람의 마음은 족할 경우가 없으니 무엇으로 이 마음을 채워 줄 수 있을까? 이 경우에 종교만이 이것을 해결하고 채워 줄 수가 있게 된다. 종교중에 불교는 먼저 사람으로 하여금 생사(生死)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풀게 하여 준다. 그것만 해결되면 일생(一生)을 녹록하여 그 소득이 무엇인가, 선(善)을 행(行)하면 그 이득(利得)이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안락(安樂)과 만족(滿足)을 얻을 수 있을까? 불교가 아니고서는 이런 문제 해결에 접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불교의 수행중(修行中)에도 참선(參禪)을 하여서 이런 나를 바로 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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