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하관(阿羅漢觀)
구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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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5 13:45
아라하관(阿羅漢觀)
아라한(阿羅漢)은 응공(應供) 불생(不生) 이악(離惡) 등으로 번역(飜譯)되는 열반(涅槃)을 증득한 성자(聖者)를 가르키는 말이다. 원시 불고(原始佛敎)에 있어서는 아직 이 아라한(阿羅漢)이란 말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解釋)은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위의 열반관(涅槃觀)에서도 나온 다음과 같은 문구는 원시경전(原始經典) 도처에 보이는 아라한(阿羅漢)의 경지를 나타낸 말이므로 이에 따라 어느 정도 그 정의를 내릴 수도 있을 것 같다. <나의 생(生)은 이미 끝나고 범행(梵行)이 이미 섰고 할 일을 다 마치어 후유(後有)를 받지 않는다.> 이것으로 본다면 아라한은 즉
1. 아생이진(我生已盡) : 범부로서의 생(生)은 이미 끝나고.
2. 범행이입(梵行已立) : 온갖 애욕(愛欲)을 끊은 청정(淸淨)한 이욕행(離欲行)이 이미 확립되어 있고
3. 소작이변(所作已辨) : 이제는 더 이상 닦을 것이 없게 되었으며.
4. 불수후유(不受後有) : 다시는 뒷 세상의 생사(生死)를 받아 윤회(輪廻)하는 일이 없는 자(者) 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즉 모든 번뇌(煩惱)가 없는 것을 열반(涅槃)이라 한다면 이것은 곧 열반(涅槃)을 증득하여 마음에 하나도 경동(傾動)이 없고 후유(後有)를 받지 않는 성자(聖者)를 말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후세(後世) 대승불교(大乘佛敎)에 오면서 이 아라한(阿羅漢)은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의 이승(二乘)의 성과(聖果)라고 하여 불타(佛陀)와 엄격히 구별하여 말하지만 초기에는 그런 구별이란 없었던것 같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1.<나는 세간의 아라한(阿羅漢 = 응공(應供)이다. 나는 무상사(無上師) 이다. 나는 유일한 정각자(正覺者)이다. 나는 적정(寂靜)하여 열반(涅槃)이다.> (남전율장(南傳律藏)
2. 처음으로 녹야원(鹿野苑)에서 교진여(驕陳如) 등 다섯 비구(比丘)가 모두 아라한(阿羅漢)이 되었을 때 이 세상에는 부처님 자신을 포함하여 여섯 아라한(阿羅漢)이 있다고 하시고 기뻐하셨으며 그 후 야사(耶査)가 아라한(阿羅漢)이 되었을 때는 일곱 아라한(阿羅漢)이 되었다고 하시고 그 후 계속하여 11. 61.아라(阿羅漢)이 되었다고 기뻐하셨다. (잡아함경(雜阿含經) 권(卷)14)
3. 여래(如來), 응공(應供), 정변지(正遍知), 명행족(明行足), 선서(善逝), 세간해(世間解), 무상사(無上士), 조어장부(調御丈夫), 천인사(天人師), 불(佛), 세존(世尊)의 여래십호(如來十號)에도 즉 아라한(阿羅漢)의 역어(譯語)인 응공(應供)이란 말이 여래(如來) 불(佛) 세존(世尊)등과 더불어 같이 쓰이고 있다. 는 것들로 미루어 보아도 능히 추지(推知)할 수 있다. 물론 경전(經典)에는 불타(佛陀)와 아라한(阿羅漢)의 구별이 전혀 안 쓰여있는 것은 아니다. 즉 상응부경(上應部經) 3에는 그 차별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비구(比丘)여, 여래(如來) 응공(應供) 정등각(正等覺)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도(道)를 일어나게 하고 아직 설(說)하지 않는 도(道)를 설(說)하고 도(道)를 알고 도(道)를 깨닫고 도(道)를 깨우친다. 모든 비구(比丘)여 이제 모든 제자는 도(道)에 따르고 순종하여 성취(成就)한다. 여기에서 비구(比丘)가 해탈(解脫)하면 그것은 이미 아라한(阿羅漢)이요 또 이에 해당하는 경(經)인 잡아함경(雜阿含經) 권(卷) 3권에는 비구(比丘)가 아니라 아라한(阿羅漢)으로 나오니 위의 말은 여래(如來)와 아라한(阿羅漢)의 차이로 보아도 좋을 것이며 그 차이란 것은 결국 불타(佛陀)는 도(道)르 스스로 깨닫고 그의 제자 아라한(阿羅漢)은 그러한 불타(佛陀)의 도(道)에 의하여 깨닫는다는 것이다.(계속)
아라한(阿羅漢)은 응공(應供) 불생(不生) 이악(離惡) 등으로 번역(飜譯)되는 열반(涅槃)을 증득한 성자(聖者)를 가르키는 말이다. 원시 불고(原始佛敎)에 있어서는 아직 이 아라한(阿羅漢)이란 말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解釋)은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위의 열반관(涅槃觀)에서도 나온 다음과 같은 문구는 원시경전(原始經典) 도처에 보이는 아라한(阿羅漢)의 경지를 나타낸 말이므로 이에 따라 어느 정도 그 정의를 내릴 수도 있을 것 같다. <나의 생(生)은 이미 끝나고 범행(梵行)이 이미 섰고 할 일을 다 마치어 후유(後有)를 받지 않는다.> 이것으로 본다면 아라한은 즉
1. 아생이진(我生已盡) : 범부로서의 생(生)은 이미 끝나고.
2. 범행이입(梵行已立) : 온갖 애욕(愛欲)을 끊은 청정(淸淨)한 이욕행(離欲行)이 이미 확립되어 있고
3. 소작이변(所作已辨) : 이제는 더 이상 닦을 것이 없게 되었으며.
4. 불수후유(不受後有) : 다시는 뒷 세상의 생사(生死)를 받아 윤회(輪廻)하는 일이 없는 자(者) 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즉 모든 번뇌(煩惱)가 없는 것을 열반(涅槃)이라 한다면 이것은 곧 열반(涅槃)을 증득하여 마음에 하나도 경동(傾動)이 없고 후유(後有)를 받지 않는 성자(聖者)를 말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후세(後世) 대승불교(大乘佛敎)에 오면서 이 아라한(阿羅漢)은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의 이승(二乘)의 성과(聖果)라고 하여 불타(佛陀)와 엄격히 구별하여 말하지만 초기에는 그런 구별이란 없었던것 같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1.<나는 세간의 아라한(阿羅漢 = 응공(應供)이다. 나는 무상사(無上師) 이다. 나는 유일한 정각자(正覺者)이다. 나는 적정(寂靜)하여 열반(涅槃)이다.> (남전율장(南傳律藏)
2. 처음으로 녹야원(鹿野苑)에서 교진여(驕陳如) 등 다섯 비구(比丘)가 모두 아라한(阿羅漢)이 되었을 때 이 세상에는 부처님 자신을 포함하여 여섯 아라한(阿羅漢)이 있다고 하시고 기뻐하셨으며 그 후 야사(耶査)가 아라한(阿羅漢)이 되었을 때는 일곱 아라한(阿羅漢)이 되었다고 하시고 그 후 계속하여 11. 61.아라(阿羅漢)이 되었다고 기뻐하셨다. (잡아함경(雜阿含經) 권(卷)14)
3. 여래(如來), 응공(應供), 정변지(正遍知), 명행족(明行足), 선서(善逝), 세간해(世間解), 무상사(無上士), 조어장부(調御丈夫), 천인사(天人師), 불(佛), 세존(世尊)의 여래십호(如來十號)에도 즉 아라한(阿羅漢)의 역어(譯語)인 응공(應供)이란 말이 여래(如來) 불(佛) 세존(世尊)등과 더불어 같이 쓰이고 있다. 는 것들로 미루어 보아도 능히 추지(推知)할 수 있다. 물론 경전(經典)에는 불타(佛陀)와 아라한(阿羅漢)의 구별이 전혀 안 쓰여있는 것은 아니다. 즉 상응부경(上應部經) 3에는 그 차별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비구(比丘)여, 여래(如來) 응공(應供) 정등각(正等覺)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도(道)를 일어나게 하고 아직 설(說)하지 않는 도(道)를 설(說)하고 도(道)를 알고 도(道)를 깨닫고 도(道)를 깨우친다. 모든 비구(比丘)여 이제 모든 제자는 도(道)에 따르고 순종하여 성취(成就)한다. 여기에서 비구(比丘)가 해탈(解脫)하면 그것은 이미 아라한(阿羅漢)이요 또 이에 해당하는 경(經)인 잡아함경(雜阿含經) 권(卷) 3권에는 비구(比丘)가 아니라 아라한(阿羅漢)으로 나오니 위의 말은 여래(如來)와 아라한(阿羅漢)의 차이로 보아도 좋을 것이며 그 차이란 것은 결국 불타(佛陀)는 도(道)르 스스로 깨닫고 그의 제자 아라한(阿羅漢)은 그러한 불타(佛陀)의 도(道)에 의하여 깨닫는다는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