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생명
구경사
0
197
04.04 08:49
영원한 생명
(佛敎)에서는 발고(拔苦) 여락(與樂)을 주장한다.경제적 이고 사회적인 면으로는 인생의 고통은 자연의 압박과 인생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러한 고통을 제거하는 길, 즉 멸고(滅苦)의 방법에는 소극적인 방법과 적극적인 방법이 있다. 영원한 생명을 보호하는 되는 소극적으로는 인생의 욕망을 제거 하는 것이고, 그것은 고집(苦集) 멸도(滅道)의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있다, 한편 적극적이 방법으로는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로 영원한 생명을 실현하는 데 있다. 영원한 생명을 실현 하는 길은 또한 보살행(菩薩行) 으로서 정토(淨土)를 건설하게 되는 것이니, 보살(菩薩)은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와, 동사섭(同事攝)의 삼행(三行)을 원만하게 하여서 극락(極樂)을 세워 모든 중생(衆生)을 그 락토(樂土)에 인도(引導)한다. 인생은 분열된 생활의 질서를 어떠한 것으로 통일시켜가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불교의 정신은 모든 인생관(人生觀)의 분열로 부터 불교(佛敎)의 독특한 인생관으로 통일시키는 데 있다. 그러면 불교의 인생관은 어떠한 것인가? 우리 불교에서는 인생 자체 뿐 아니라 모든 것을 고로 본다. 일체 개고(一切皆苦)이다. 불교의 참 뜻은 이 고를 떠나는 데 있다. 아무리 높은 지위, 아무리 큰 권세를 잡아 무상의 영달을 누린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즐거움도 고(苦)의 문(門)으로 통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고(苦)와 낙(樂)을 초월(超越)하라는 것이다. 불교의 정진(精進)은 위로는 불(佛)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衆生)을 교화(敎化)하는 데 있는 것이다. 위로 부처님을 구하는 일이나 아래로 중생을 제도하는 일이 모두가 고를 여의는 일이고 모두가 고를 여의는 공부이고 그 실천의 행이다. 부처를 이루지 아니하고 이 고해(苦海)의 윤회(輪廻)를 벗어날 길이 없고, 이 세상의 중생을 건저내지 않는 한 사바(娑婆)는 영원히 정토화될 수 없다. 그런데 우리 불교에서는 일체를 마음의 작용으로 본다. 이 모든 세상의 삼라 만상이 마음에서 생겨나고 일체의 사상(思想)이 마음에 의하여 일어나고 사라진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감각 하는 고도, 낙도, 그리고 희비도, 모두 마음의 작용인 것이다. 말하자면 일체의 세간사가 마음 쓰기에 달린 것이다. 아무리 즐거운 일도 괴롭다 생각하면 그것은 고요, 또한 슬픈 일도 마음을 돌려 인연(因緣)을 생각하면 그다지 괴로움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에 낙망하지 말고 쾌락에도 유혹되지 아니하면, 오히려 그러한 모든 감정을 초월하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세속적인 감정을 초월, 고락을 떠날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살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런 의미를 깊이 되세겨 영원한 생명을 살기 위해 노력합시다.
(佛敎)에서는 발고(拔苦) 여락(與樂)을 주장한다.경제적 이고 사회적인 면으로는 인생의 고통은 자연의 압박과 인생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러한 고통을 제거하는 길, 즉 멸고(滅苦)의 방법에는 소극적인 방법과 적극적인 방법이 있다. 영원한 생명을 보호하는 되는 소극적으로는 인생의 욕망을 제거 하는 것이고, 그것은 고집(苦集) 멸도(滅道)의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있다, 한편 적극적이 방법으로는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로 영원한 생명을 실현하는 데 있다. 영원한 생명을 실현 하는 길은 또한 보살행(菩薩行) 으로서 정토(淨土)를 건설하게 되는 것이니, 보살(菩薩)은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와, 동사섭(同事攝)의 삼행(三行)을 원만하게 하여서 극락(極樂)을 세워 모든 중생(衆生)을 그 락토(樂土)에 인도(引導)한다. 인생은 분열된 생활의 질서를 어떠한 것으로 통일시켜가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불교의 정신은 모든 인생관(人生觀)의 분열로 부터 불교(佛敎)의 독특한 인생관으로 통일시키는 데 있다. 그러면 불교의 인생관은 어떠한 것인가? 우리 불교에서는 인생 자체 뿐 아니라 모든 것을 고로 본다. 일체 개고(一切皆苦)이다. 불교의 참 뜻은 이 고를 떠나는 데 있다. 아무리 높은 지위, 아무리 큰 권세를 잡아 무상의 영달을 누린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즐거움도 고(苦)의 문(門)으로 통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고(苦)와 낙(樂)을 초월(超越)하라는 것이다. 불교의 정진(精進)은 위로는 불(佛)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衆生)을 교화(敎化)하는 데 있는 것이다. 위로 부처님을 구하는 일이나 아래로 중생을 제도하는 일이 모두가 고를 여의는 일이고 모두가 고를 여의는 공부이고 그 실천의 행이다. 부처를 이루지 아니하고 이 고해(苦海)의 윤회(輪廻)를 벗어날 길이 없고, 이 세상의 중생을 건저내지 않는 한 사바(娑婆)는 영원히 정토화될 수 없다. 그런데 우리 불교에서는 일체를 마음의 작용으로 본다. 이 모든 세상의 삼라 만상이 마음에서 생겨나고 일체의 사상(思想)이 마음에 의하여 일어나고 사라진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감각 하는 고도, 낙도, 그리고 희비도, 모두 마음의 작용인 것이다. 말하자면 일체의 세간사가 마음 쓰기에 달린 것이다. 아무리 즐거운 일도 괴롭다 생각하면 그것은 고요, 또한 슬픈 일도 마음을 돌려 인연(因緣)을 생각하면 그다지 괴로움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에 낙망하지 말고 쾌락에도 유혹되지 아니하면, 오히려 그러한 모든 감정을 초월하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세속적인 감정을 초월, 고락을 떠날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살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런 의미를 깊이 되세겨 영원한 생명을 살기 위해 노력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