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어디에
구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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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8 08:02
부처님은 어디에
우리는 불교(佛敎)를 믿으면서도 어디에 부처님이 계시는가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대부분의 신자(信者)들은 산(山)으로 사찰(寺刹)로 찾아다니면서 부처님이 나타나서 은혜(恩惠)를 내려 주시기를 기도(祈禱)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데 있다. 불교(佛敎)의 경전(經典)마다 "중생(衆生)과 제불(諸佛)이 평등(平等) 하다.,, "일체 중생(一切衆生)이 모두 불성(佛性)이 다 있다.,, "부처님 몸이 법계(法界)에 충만(充滿)하다.,, 하는 말씀이 많이 있다. 그렇다면 일체 중생이 모두 부처요, 부처가 모두 중생일 터인데, 그렇다면 나도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내가 나를 살펴볼 때 절대로 부처는 아니다. 또한 일체 중생을 보아도 부처가 아닐 뿐 아니라. 부처를 닮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무엇이 편단되었기에 이런 엉터리 말이 나왔단 말인가? 그렇다고 부처님 말씀을 엉터리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는 일이며 내가 나를 잘못 보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나를 잘못 보지 않은 이상 부처님 말씀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이런 차이가 생기게 된 것일까요? 이 말은 이렇다. 나는 나의 입장에서 나를 본 것에 불과하고 부처님은 부처님의 입장에서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 없고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도 잘못이 없는 것이다. 어느 청명한 가을날, 고산지대에 있는 태백산 동암에 있을 때 이다. 하늘은 티 한점 없이 맑고 태양은 눈부시게 비추워, 만리 시야가 하나도 가리어진 것이 없이 드러난 뜻한 정상들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골짜기를 굽여보면 안개가 자욱한이 끼어서 전세계가 온 천지에 파묻혀 있는 뜻한 감을 주었다. 그런데 이때 산 아래에서 올라온 사람이 있어 그 자의 말을 들어보니 지금 하계(下界)는 굉장히 큰 비가 쏟아지고 있어 강물이 넘쳐 흐르고 돌담이 무너지는 등 수해가 많다는 것이다. 이 말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전히 태양은 눈부시계 빛나고 있는데 발아래 세계에는 천둥에 비가 내리다니 이개 무슨 조화란 말인가? 이곳 산상(山上)이 청명하다는 것도 사실이고 하계에 비가 온다는 것도 사실이라면 같읕 하늘 아래 태양은 사사(私私)없이 평등하게 비추었건만 다만 구름의 농간으로 상계 하계(上界下界)가 서로 달라지고 있는 것이니, 이곳에 앉아서 세계가 청명하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 없고, 하계에 비가 내리고 있다고 하는 것도 잘못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구름이 걷히고 비가 개이면 위나 아래 세계가 똑같이 될 터인데 이 경계를 가르는 것이 오직 구름일 뿐이다. 인간에게도 태양과 같은 고귀한 불성이 있으나, 구름과 같은 번뇌(煩惱) 망상(妄想)이 끼어서 불성(佛性)을 가리므로 아무리 보아도 불성은 보이지 않고 번뇌 망상만 보이나니, 진정 불성을 찾아볼려거던 먼저 애써 마음에 있는 번뇌 망상을 벗겨 버리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이 일은 우리가 할려고만 마음 먹으면 노력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불성(佛性)을 얻는 일이 나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는 사람은 하기도 전에 "안 되는 일,,하고 규정지어 버리는 자의 고정 관념 때문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결단을 내려서 자기가 건너야 할 바다를 건너기 위하여 항해를 단행하여 목적을 달성하는데, 어떤 사람은 막연히 자기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로 단정하여 버린다면 이 사람은 자신의 육체의 의지를 겨루어보기도 전에 정신적으로 패배자로 전락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대할 때 우리는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하면 되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달성하면 비교도 할 수 없는 광명(光明)과 행복(幸福)이 보장되건만 왜 이것을 거절한단 말인가? 이것은 정신 분석적인 면에서 볼 때 자기 번뇌, 자기 망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포로가 된 사람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계속)
우리는 불교(佛敎)를 믿으면서도 어디에 부처님이 계시는가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대부분의 신자(信者)들은 산(山)으로 사찰(寺刹)로 찾아다니면서 부처님이 나타나서 은혜(恩惠)를 내려 주시기를 기도(祈禱)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데 있다. 불교(佛敎)의 경전(經典)마다 "중생(衆生)과 제불(諸佛)이 평등(平等) 하다.,, "일체 중생(一切衆生)이 모두 불성(佛性)이 다 있다.,, "부처님 몸이 법계(法界)에 충만(充滿)하다.,, 하는 말씀이 많이 있다. 그렇다면 일체 중생이 모두 부처요, 부처가 모두 중생일 터인데, 그렇다면 나도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내가 나를 살펴볼 때 절대로 부처는 아니다. 또한 일체 중생을 보아도 부처가 아닐 뿐 아니라. 부처를 닮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무엇이 편단되었기에 이런 엉터리 말이 나왔단 말인가? 그렇다고 부처님 말씀을 엉터리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는 일이며 내가 나를 잘못 보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나를 잘못 보지 않은 이상 부처님 말씀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이런 차이가 생기게 된 것일까요? 이 말은 이렇다. 나는 나의 입장에서 나를 본 것에 불과하고 부처님은 부처님의 입장에서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 없고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도 잘못이 없는 것이다. 어느 청명한 가을날, 고산지대에 있는 태백산 동암에 있을 때 이다. 하늘은 티 한점 없이 맑고 태양은 눈부시게 비추워, 만리 시야가 하나도 가리어진 것이 없이 드러난 뜻한 정상들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골짜기를 굽여보면 안개가 자욱한이 끼어서 전세계가 온 천지에 파묻혀 있는 뜻한 감을 주었다. 그런데 이때 산 아래에서 올라온 사람이 있어 그 자의 말을 들어보니 지금 하계(下界)는 굉장히 큰 비가 쏟아지고 있어 강물이 넘쳐 흐르고 돌담이 무너지는 등 수해가 많다는 것이다. 이 말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전히 태양은 눈부시계 빛나고 있는데 발아래 세계에는 천둥에 비가 내리다니 이개 무슨 조화란 말인가? 이곳 산상(山上)이 청명하다는 것도 사실이고 하계에 비가 온다는 것도 사실이라면 같읕 하늘 아래 태양은 사사(私私)없이 평등하게 비추었건만 다만 구름의 농간으로 상계 하계(上界下界)가 서로 달라지고 있는 것이니, 이곳에 앉아서 세계가 청명하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 없고, 하계에 비가 내리고 있다고 하는 것도 잘못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구름이 걷히고 비가 개이면 위나 아래 세계가 똑같이 될 터인데 이 경계를 가르는 것이 오직 구름일 뿐이다. 인간에게도 태양과 같은 고귀한 불성이 있으나, 구름과 같은 번뇌(煩惱) 망상(妄想)이 끼어서 불성(佛性)을 가리므로 아무리 보아도 불성은 보이지 않고 번뇌 망상만 보이나니, 진정 불성을 찾아볼려거던 먼저 애써 마음에 있는 번뇌 망상을 벗겨 버리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이 일은 우리가 할려고만 마음 먹으면 노력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불성(佛性)을 얻는 일이 나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는 사람은 하기도 전에 "안 되는 일,,하고 규정지어 버리는 자의 고정 관념 때문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결단을 내려서 자기가 건너야 할 바다를 건너기 위하여 항해를 단행하여 목적을 달성하는데, 어떤 사람은 막연히 자기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로 단정하여 버린다면 이 사람은 자신의 육체의 의지를 겨루어보기도 전에 정신적으로 패배자로 전락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대할 때 우리는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하면 되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달성하면 비교도 할 수 없는 광명(光明)과 행복(幸福)이 보장되건만 왜 이것을 거절한단 말인가? 이것은 정신 분석적인 면에서 볼 때 자기 번뇌, 자기 망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포로가 된 사람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