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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구경사 0 238
선문(禪門)
선(禪)은 지금까지 배운 모든 지식(知識)을 잊어버리는 공부(工夫)이다. 라고도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식자우환(識字憂患)의 폐단을 가르켜서 문자(文字)의 노예가 되어, 허덕이는 사람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가(禪家)에서는 불입문자(不立文字)라 하여 문자(文字)를 배척(排斥)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본래 일념불생(一念不生)이며 언어문자(言語文字)가 있을리 만무하며 또한 개구즉착(開口則錯)이라 입을 열면 이미 그릇쳤다고 하였으니 입을 열지 안는곳에 언어문자(言語文字)가 존재(存在)할 이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모두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제거(除去)하여 분별(分別)없는 무위지경(無爲之境)으로 인도(引導)하기 위(爲)한 방편(方便)이지 결(決)코 문자(文字)를 배척(排斥)하는 것은 아니다. 문자(文字)에 착(着)하면 자연 사고(思考)하게 되고 사고(思考)하면 분별세계(分別世界)로 들어가 문자(文字)의 취사(取捨)에 걸러서 허덕이면, 언제 일념불생(一念不生) 부동지(不動地)를 참구(參究)하여 나아가는 공부인(工夫人)이 될 수 있으랴. 우리는 모든 망상(妄想)은 끊고, 시심마(是甚麽 = 이 무엇인고)하는 당장(當場) 이 글을 보고 있는 이 물건(物件)이 바로 선(禪)인 동시에 마음이다. 그 마음을 대오(大悟)하여 자유자재(自由自在) 하므로서 만이 최상승도(最上乘道)를 수행(修行)하는 사람이라 하겠다. 일체법(一切法)을 취하지 않는것이 선(禪)이요, 일체(一切) 언어(言語) 문자(文字)를 떠난것이 선(禪)인 동시에 일체(一切) 언어(言語) 문자(文字)가 불이(不離)한 것이 선(禪)이므로, 언어(言語) 그대로가 선(禪)이요, 문자(文字) 그대로가 선(禪)인 것이다. 그러므로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그대로가 마삼근(麻三斤) 그대로가 무(無) 그대로가 선(禪)인것이다. 만약 여기에 티끌 만치라도 분별심(分別心)을 내면 선(禪)과는 천지현격(天地懸隔)이 될것이다. 왜? 어째서? 가 붙어서 사량(思量)한다면 어찌 일념불생(一念不生)이 되며 성성적적(惺惺寂寂)한 부동지(不動地)를 이룰수 있겠는가? 일체 만법(一切萬法)과 일체만물(一切萬物)이 선(禪)과 떠난 것이 없으므로 일체만법(一切萬法)과 일체만물(一切萬物)이 선(禪)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그대로가 선(禪)이 거늘 홀로 언어문자(言語文字)에 한(限)해서 만이 배척(排斥)할 리가 있겠는가? 오히려 언어문자(言語文字)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활용(活用)하여 더욱 선지(禪旨)를 밝히고, 한층더 향상함에 있어서 이용(利用)하는 것이 선(禪)의 진면목(眞面目)일 것이다. 즉 불교(佛敎)의 진면목(眞面目)이다. 우리 선자(禪子)들은 좀 더 이 불입문자(不立文字)라는 문제에 대하여 진지한 태도를 가져야만 하겠다. 불입문자(不立文字)라 하여 무조건(無條件) 문자(文字)를 배척해도 안될 것이며, 너무나 문자(文字)만을 지나치게 탐착(貪着)하여도 안될 것이다. 선(禪) 그 자체가 문자(文字)로서 도저히 표현(表現)할 수 없는 문자이전(文字以前)과 사량이전(思量以前)의 그 자리를 선(禪)이라 하기 때문에 불입문자(不立文字)라 하는 것이므로 불필요(不必要) 보다도 불착심(不着心)하는 원리(原理)라 하겠다. 선(禪)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견성성불(見性成佛)에 있는 것이므로 자타(自他)가 다 같이 참선(參禪)하여 자성(自性)을 증득(證得)하여 일체무애(一切無碍)한 대 저유인(大 自由人)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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