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람들을 대할 때
구경사
0
324
08.02 21:45
이런 사람들을 대할 때 우리는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하면되고 할 수 있고 반드시 그것을 달성하면 비교도 할 수 없는 광명과 행복이 보장되건만 왜 이것을 안한단 말인가.? 이것은 정신 분석적인 면에서 볼 때 자기 번뇌(煩惱), 자기 망상(妄想)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포로가 된 사람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보다 항상되고 이상적인 차원을 추구 할 필요가 있고 그것은 필수적인 것이다. 하물며 부처는 먼 데 있지 않고 나에게 있다고 하는데야 어찌 작은 노력으로 큰 마음의 광명을 쫓아 추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만일 부처라면 미(迷)한 때가 언제일까.? 금(金)이 다시 광석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 처럼 부처는 다시 미하는 법이 없으니 나는 다만 깨닫지 못한 부처일 뿐이요, 모든 여래들은 이미 깨달은 부처이다. 그 점이 나와 부처가 구별되는 점일 뿐 이다. 벽만 헐어 버린다면 나와 부처가 평등하다고 하기보다 나도 없고 부처도 없게 되는 것이다. 태양은 동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 옛날 박연암이 요동을 지날 때 하루가 걸렸다. 연암은 말하기를 "태양이 밭에서 떠서 밭으로 진다.,,고 하였다. 산에 사는 사람은 해가 산에서 떠서 산으로 진다고 말하며, 바다에 사는 사람은 해가 바다에서 떠서 바다로 진다고 한다. 그러나 태양은 언제나 가만이 있는것, 태양 자체는 뜨는 일도 지는 일도 없다. 다만 지구가 자전함에 따라서 일 뿐인데 사람들은 뜨고 진다고 말할 뿐이다. 그뿐 아니라 구름이 끼거나, 폭풍우가 오거나, 밤이 되어도 항상 태양 광선은 그대로 있을 뿐이다. 이 이치를 파악만 한다면 부처님과 나와의 사이에 미묘한 이치가 짐작이 되리라 생각한다. 부처님은 항상 불성으로써 집안에 묻혀 있는 보장과, 옷 속에 달려있는 명주에 비유하였다. 이것은 하늘이 가린 것도 아니요, 땅이 숨긴 것도 아니요, 또는 어느 누가 감춘 것이 아니라 다만 내가 알지 못했을 따름인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있는 것을 간간히 말하였지만 곧이 듣지 않고 있다가 이제 와서는 부처님께서 깨우쳐 주시는 말씀까지 잊어버리고 말았다. 심지어는 내게 불성이 있는것 조차 모를 뿐 아니라, 나아가서 불성이 무엇인가 조차도 알지 못하는 현상으로 전락되고 말았으니, 내가 서 있는 입장에서 부처님의 금강보좌를 바라볼때에는 이수나 일정으로 따질 수 없어서 아주 절망한 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스스로 생각할 때 부끄럽고 애닲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런 경우란 우리들 태반이 격는 일이다. 그래서 남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자기가 먼저 깨우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에서 자경문이란 책을 쓰신 야운조사는 그 책 속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모든 부처님도 옛적에는 모두다 나와 같은 범부였고 저들이 대장부 일진대 너 역시 대장부이니 다만 하지 않을 따름이요,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니라.,,고 하시였다. 좋은 말씀이다. 인간의 욕망이란 그 끝이 없어 타인이 가진 재질이나 재물등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하고 싶어 한다. 사실 그것은 결국은 달성 되는 경우도 많다. 열심히 노력을 하면 되는 것이다. 남이 가진 깊은 학문적 경지나 예술적 경지 비장의 기술 등을 배워내기도 하고 심지어는 남이 가지고 있는 지위나 영화 를 쟁취하려고 일생을 통하여 심력을 기울이며 시간을 허비하기도 한다.그러나 우리가 불성을 찾는데는 신심만 있으면 된다. 이것은 맨손으로 하겠다는 마음만 가지면 능히 되는 것이다. 사람이 남의 일을 위해서 신심을 내라고 하면 모르되 자기의 일을 위하여 신심을 내라고 하는데야 주저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세상 사람들이 딴엔 자기 일들을 하기 위하여 분망하게 움직이지만 참다운 자기 일에는 손도 대지 못하고 매양 헛일만 일삼고 있으니 답답한 일이아닐 수 없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특히 오늘날과 같은 혼탁한 사회 환경에서는 먼저 자기가 자기를 발견하는데, 그리고 자기 속에서 불성을 찾는 성의가 무엇보다도 중대사임을 강조하는 바이다. 그럼 이제부터 우리 모두 나에게 본래 갖추어져 있는 나의 부처를 내 스스로 찾는일에 노력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